[ET시론]노동은 왜? : 470억원 대 35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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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남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1988년 7월 8일이 그렇다. 이날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된 '초선의원' 노무현이 대정부 질의에 나섰다. 말은 선명했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대목은 아래 내용일 것이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1988년 7월 8일, 노무현 의원 대정부질문 中

하지만 '노 의원'이 정말로 이야기하고 싶어 한 조금 더 중요한 대목은 조금 뒤에 등장한다. “지금까지 노동자가 기업주의 비인간적 대우에 항거하거나 기업 또는 공권력의 탄압에 항거해서 목숨을 끊은 사람은 모두 몇 명이나 됩니까? (중략) 헌법을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해 놓고 있고, 이를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여러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민은 국가만 믿고 있으면 잘될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 같은 규정 외에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을 다시 규정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 노동자는 인간이 아닌가? 이미 인간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행복할 권리를 헌법에 명시해 뒀는데 왜 굳이 '노동자'의 권리 규정을 별도로 둔 것일까. 노동자는 일하고, 기업주는 그에 합당한 임금을 지불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룰이다.

그러나 비인간적 대우가 횡행한다. 왜? 노동자는 그 지위상 약자의 위치에 놓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공권력, 즉 국가의 제도와 역할이 중요하다. 공권력이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한 활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중재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는 순간 '판'이 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선의원 노무현은 노동과 경영 사이의 긴장 상태를 피할 수 없다면 최소한 기울어진 운동장만이라도 바로잡아서 '대등한 자격'을 갖춘 자들의 '대등한 교섭'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이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7명 바뀌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부정할 수 없는 선진국이 됐다. 다른 국가의 뒤를 애타게 따라가는 추격형 경제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선도 국가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권의 현주소는 어떨까. 선진국의 위상에 맞는, 세계의 그 어떤 국가도 부럽지 않은 정도의 성취를 이뤘을까?

현주소가 이번 '대우해양조선 파업 사태'에서 드러났다. 당시 윤석열 대통령은 연일 '공권력 개입'을 사태 해결의 열쇠로 규정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폭압적인 쌍용차 사건을 연상케 하는 '경악스러운 해결책'과 노동인권 경시도 충격적이었고, 국가 제조업의 핵심이자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대한민국 조선업의 근간을 뒤흔든 것도 경악스러웠다.

조선업은 고용과 물류 등 산업경제 전반에 미치는 파급력이 상당할 뿐만 아니라 해상풍력 같은 신재생에너지 체계 구축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특히 대우조선해양은 SLBM 잠수함을 건조하는 등 '국가안보'의 한 축을 담당한다. 이런 조선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대체 불가능한 '고숙련 노동자'다. 숙련된 노동자가 없다면 품질 관리가 하락하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론 수주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누가 기술 관리가 부족한 기업에 선박 제조를 맡기려 하겠는가. 상식이다. 즉 조선업 고숙련 노동자들은 '국가 핵심 인력'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당시 그들의 처우는 지극히 열악하기만 했다. 그 무덥던 여름날 누울 수도 없는 0.99㎡(약 0.3평) 공간에서 농성하고 있단 유최안 부지회장만 해도 20년 넘는 경력을 자랑하는 최고의 용접기술자이지만 임금은 연장수당을 모두 합쳐 300만원 수준이 아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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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간 타협이 가까스로 이뤄졌지만 더 큰 후폭풍이 몰아쳤다. 처음엔 8000억원, 그다음엔 2800억원 손실이라는 얘기가 나오더니 결국 연봉이 3500만원도 안 되는 노동자에게 470억원 규모의 천문학적 손해배상 액수가 청구됐다. 갚을 수 없다. 노조 활동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노조는 와해되고, 월급과 부동산이 압류되고, 일상이 무너진다. “노동하기 좋은 나라”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소리가 과연 어떻게 들리는가.

비단 대우조선해양만의 문제가 아니다. 2020년 기준 누적된 손해배상 청구 금액은 658억원에 이른다. 2014년 당시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약 47억원의 손해배상이 청구됐고 33명의 노동자와 가족이 세상을 떠난 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틀 뒤인 2012년 12월 21일 사측으로부터 158억원 규모의 손배소에 내몰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자 최강서 씨의 죽음은 어디선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제도를 바꿔야 한다. 이것이 국회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절실히 필요한 법률이 합법적인 노조 활동의 범위를 늘리고, 노동자 개인과 신원 보증인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못하도록 합리적으로 제재하고, 상한액을 규정하는 '노란봉투법'이다. 19대 국회에서부터 꾸준히 발의됐지만 손해가 있으면 갚아야 한다는 민사법 원리만 강조돼 번번이 좌절했다. 실제로 독일은 손해배상 청구가 발생하는 일을 쉬이 찾을 수 없고, 영국은 액수 상한을 둔다. 현재 국회에는 필자를 포함해 임종성·이수진(이상 더불어민주당)·강은미(정의당) 의원의 '노란봉투법'이 발의돼 있다.

그러나 보수정당은 오직 '경영권'만을 말할 뿐이다. 노동의 권리를 말하는 것은 '빨갱이스럽다'는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노동자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 제33조나 노동조합의 단체행동에 대한 면책 조항을 담고 있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 사문화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가 절대 선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더불어민주당도 절대 선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상대성 원리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조금 더 바람직한 결과에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그 일을 하기 위해 국회가 존재한다. 470억원과 3500만원.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지금이다. 지금이 제도를 바꿀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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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kangbw89@gmail.com

<필자>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거쳐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수행비서를 시작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참여정부 인수위를 거쳐 청와대 행정관으로 일했다. 20대 총선 서울 은평구(을)에서 처음 당선됐다. 당시 당내 경선에서는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본선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 최측근인 5선의 이재오 의원(무소속)을 상대로 연이어 승리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국회 환경노동위원·운영위원·기획재정위원·보건복지위원을 지냈다. 문재인 대통령 직속 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 민주당 정책위원회 선임부의장을 거쳐 민주당 미래전환 K-뉴딜위원회 상임부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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