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직 변호사의 DX문화살롱](29)디지털시대, 죽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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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 있다. 죽음이다. 우린 태어나면서 죽음을 선고받은 사형수다. 염색체 끝에서 세포 복제를 돕는 것이 텔로미어다. 세포 복제가 거듭될수록 길이가 짧아진다. 더 이상 복제를 돕지 못할 때 세포는 죽음을 맞는다. 텔로머라아제의 도움을 받는 암세포만 예외다. 죽음의 정의도 다양하다. 장자에겐 사람의 기가 흩어지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자연에서 우연히 결합된 원자들의 해체라고 했다. 하이데거에겐 피할 수 없는 가능성으로서의 확실한 미래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뿐이다. 죽음은 공동체 구성원이 개별적인 차원에서 맞는 유한성의 종말이다.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는 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전에서 최초로 육지에 오르는 군인들의 비장한 장면을 찍었다. 스페인 내전에선 흙먼지 날리는 참호를 뛰어나가다 총탄에 맞은 군인을 찍었다. 그들은 죽었다. 육지로 향하는 전함 안에서, 흙먼지 날리는 참호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두뇌엔 많은 생각의 시간이 있었다. 살기 위해 달아나야 할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져야 할까.

몸 밖 기관은 몸 속 기관보다 고통을 쉽게 느낀다. 외부의 충격은 생명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통을 크게 해서 위험을 쉽게 인식할 수 있게 했다. 우리의 머리는 가장 안쪽에 파충류에게도 있는 뇌간이 있다. 위험에 처했을 때 즉각 도망하거나 상대를 공격하게 한다. 뇌간을 둘러싼 것이 대뇌 변연계로, 포유류에게 있다. 대뇌 변연계를 둘러싼 것이 영장류에게만 있는 대뇌피질이다. 감각기관을 통해 수집된 정보 분석, 시뮬레이션 등 사고와 의사결정이 거기서 이뤄진다. 그렇다고 대뇌피질이 직접 행동에 나설 수는 없고 각 신체 영역에 신호를 보내 행동하게 한다. 대뇌피질은 두뇌의 약 70%를 차지한다.

우리는 표범처럼 빨라지는 것, 코끼리처럼 커지는 것을 포기하고 대뇌피질을 키웠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만났을 때에 즉각 돕지 못했다고 자책하지 마라. 대뇌피질은 그 사람이 위험에 빠진 것이 맞는지, 부부나 친구 간 다툼에 불과한지, 내가 뛰어들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내가 민·형사 책임까지 떠안게 되지 않을지 고민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기 때문이다.

총 직원이 100명인 회사에 대표를 포함한 임원이 70명이라면 어떨까. 그게 대뇌피질이다. 그런 대뇌피질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우린 다른 동물과 달리 정신적 고통이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그 고통이 심하면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대뇌피질이 고민 끝에 자살을 결정해도 뇌간이 있는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한다. 그 저항이 무너질 때 우리는 죽는다.

디지털 세상은 밀접, 투명, 접속, 경쟁 촉진 사회이다. 조회수를 높이려고 죽음조차 중계한다. 죽음은 인간이 유한성의 종말을 위해 고요히 혼자 맞서야 할 순간이다. 노화는 생명의 연장이어야 하고, 죽음의 지연일 수 없다. 그러나 고통뿐인 노화라면 존엄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현대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격렬하게 투쟁하는 사회이고, 디지털 공간도 다르지 않다. 투쟁에서 승리해야 명예와 부를 얻는다. 정의의 외침은 가지지 못한 자의 넋두리로만 읽힌다. 디지털 세상은 비교 사회이기도 하다. 플랫폼과 각종 기기에서 모든 것을 비교한다. 상품을 넘어 사람을 비교한다. 현실의 고통에 상대적 박탈감이 더해진다. 타인보다 못하다고 느끼는 순간 고통이 된다. 그 끝은 죽음이다. 디지털 시대라 해도 죽음이 로그아웃으로 남을 순 없다.

디지털 시대엔 죽음을 공부해야 한다. 죽음을 생각하며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디지털 속 타인의 고통을 읽어야 한다. 디지털 공간이 타인을 짓밟고 자신의 자유를 무한으로 확대하는 전쟁터일 순 없다. 언젠가 닥쳐올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 다를 것이 없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나는 인공지능을 변호한다' 저자) sangjik.lee@bk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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