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인재 없는 기술패권은 모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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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영철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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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시아 순방 첫 행선지로 대한민국을 택한 데 이어 지난 20일 방한하자마자 경기 평택시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찾았다. 이튿날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동참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IPEF는 미국이 글로벌 공급망, 탈탄소 및 인프라, 무역, 부패 방지 등 분야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내 파트너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출범시키는 포괄적 경제 협의체다. 최근의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미 양국이 경제 분야 협력과 공조를 적극적으로 강화하는 전략이자 안보 동맹을 기술 동맹으로 확대하겠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바야흐로 경제안보 시대다. 차세대 기술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국가 간 경쟁이 정치·외교 관련 이슈와 어지럽게 얽히면서 이제는 산업 성장 전략을 짜는 과정에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 많아졌다. 미국, 유럽, 중국, 일본은 4차 산업혁명을 지탱하는 근간 산업인 반도체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수십조원을 투자해서 원자재 확보, 공장 유치, 세제 혜택 제공 등에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도 오는 8월 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 시행을 앞둔 상황이다. 특별법에는 주요 산업 공급망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이른바 '알박기'를 할 만한 전략 기술을 개발하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관련 업계를 지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초격차 확보를 위한 핵심 전략 가운데 하나는 당연히 우수한 인재 확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주력 산업 현장에서는 오래전부터 일손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이 매년 조사해서 발표하는 산업기술인력 수급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반도체 분야 기술 인력 부족률은 1.6%다. 바이오헬스(3.2%)와 소프트웨어(4.0%) 산업 부족률은 더 심각하다.

전문 인력을 기르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미래를 준비하는 기업에 인재 확보라는 과제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앞으로 산업 인재 양성 패러다임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첫째 기존의 틀을 깨는 유연한 교육 과정, 기업 인력 수요를 반영한 다양한 형태의 교육 기관이 대거 도입돼야 한다. 전통 학교 제도로는 신산업 분야의 인력 수급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학위 없는 사설 기관인 프랑스 에콜42는 정해진 강의나 교수는 없지만 동료 간 협업 기반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문제 해결력을 기른다. 우리도 민간 기업 또는 대학이 유연한 교육 과정을 자율적으로 만들어 내면 규제를 일정 기간 유예하는 식으로 사전 간섭을 최소화하면 좋겠다.

이것이 가능하게 하려면 정부의 과감한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 시행으로 계약학과나 특성화대학원 설치 근거는 마련됐지만 여전히 학부 정원 자율화 등 교육 규제 혁신에 대한 목소리가 높기 때문이다. 특별법 후속 조치를 이행해 나가되 필요하다면 별도의 법을 제정해서라도 기술 인재 확보에 미진한 부분은 보완했으면 한다.

둘째 민간이 주도하는 혁신 교육 실험이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 기업에 필요한 기술 수요와 인재상은 점점 빠르게 변화한다. 그런데 한번 만들면 바꾸기 어려운 기존 대학 강의 커리큘럼이 이러한 변화에 탄력적으로 맞추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인재 양성을 외부(대학)에만 맡길 수 없다면 기업이 필요한 인재는 직접 길러서 쓰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

기업 수요를 적극 반영한 특화 교육 과정 확대는 필연적이다. 이미 신산업 분야에서는 기업들이 사내 대학을 만들거나 채용과 연계한 무료 교육을 자체적으로 개설하기도 한다. '가르쳐서 뽑는' 방식의 필요성을 느낀 국내 다수의 중소·중견기업도 조기 취업형 계약학과 같은 정부 사업을 활용해 학부생을 미리 채용하는 등 인재 발굴에 힘쓰고 있다. 혁신 교육 사례로 꼽히는 에콜42와 미네르바대학 역시 기업가가 설립한 교육 모델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산업 환경과 여건을 고려해서 세밀하게 접근할 것을 제안한다. 신규 인력을 충분히 공급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기존 인력이 소외되지 않도록 정책적 배려를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산업의 디지털전환이 빨라지면 앞으로는 기업이 성장하더라도 예전만큼 고용이 늘거나 유지되기 어렵다. 재직자, 퇴직자들은 기존에 맡고 있던 업무 내용이나 형태에 큰 변화를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업무 재배치, 이직, 전직을 돕기 위한 역량 고도화 교육이 필요하다. 숙련도 제고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SW)를 배우게 해서 디지털화에 대응할 수 있게 하고(Upskilling), 새로운 업무로의 전환을 원하는 사람에게도 맞춤형 교육을 제공(Reskilling)해야 하겠다.

'세계화 시대는 끝났다'는 다소 극단적인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자국 우선주의, 각자도생이 활개를 치는 시기다. 하지만 '인재'라는 필승 전략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우수한 혁신 인재를 충분히 양성한다면 'K-제조업'의 매력과 가치는 지금보다 더 많이 올라갈 것이며, 그때는 우리가 파트너를 찾기 전에 먼저 다른 나라들이 손을 내밀 것이다. 글로벌 인재 허브로 주목받는 동시에 전략 산업 공급망에서 중요한 연결고리를 차지할 수 있다.

인재 없이는 기술 패권도 없다. 기술인재 양성이 국가 차원의 최우선 과제로 떠오른 만큼 이를 대하는 우리 태도에도 전환이 필요하다. 공급자 위주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경직적 규제에서 탄력적 자율 체제로, 주어진 커리큘럼에 인재를 욱여넣는 소극적 시스템에서 기업 의견을 반영해 변형 가능한 적극 시스템으로 옮겨 가야 한다. 새로 들어선 정부에서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고 지름길로 갈 수 있길 기대해 본다.

<필자 소개>

석영철 원장은 1994년 한국산업기술평가원에 입사, 25년 동안 산업기술 분야 한 우물만 파 온 전문가다. 한국산업기술평가원에서 정책연구부장과 전략기획단장, 한국산업기술재단에서 정책연구센터장으로 일했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에서 기술전략본부장과 기술기반본부장을 역임했다. KIAT 원장에는 2019년 6월 취임했다. 취임 이래 산업기술 연구개발(R&D) 사업을 강화하고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사업을 확대하는 등 정부 산업기술 정책을 지원하고 있다.

석영철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ycseok@kia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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