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조원. 삼성전자가 올해 첫 분기에 기록한 매출이다. 회사 설립 53년이 지났지만 이보다 더 높은 매출을 기록한 분기는 없었다. 반짝 실적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개 분기 모두 해당 분기 최대 매출 신기록을 수립했다. 연간 기준으로도 279조원이 넘는 매출로 역대 최대 기록을 세웠다.
신기록 행진을 이어 갔지만 분위기는 차분하다. 축포를 터뜨릴 만도 하지만 곳곳에서 불안하다는 이야기마저 들린다. 파운드리 시장에서 우리나라는 삼성전자가 나 홀로 분투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의 점유율은 지난해 18%에서 올해 16%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 TSMC는 올해에만 최대 52조원 규모의 설비 투자를 예고했다. 인텔 역시 파운드리 시장 진출을 선언하며 올해 약 24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반면에 삼성전자의 올해 설비 투자 금액은 12조~16조원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시장 1위 TSMC와의 점유율 격차는 올해 40%포인트(P)대까지 벌어진 데다 2위 수성마저 위태롭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TV와 가전시장도 마찬가지다. 주력인 액정표시장치(LCD) TV시장은 수익성 하락과 함께 수요 역시 줄어들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16년 연속 시장 1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유기발광다이오드(OLED)TV 시장이 치고 올라오면서 시장 지배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가전 부문은 코로나19 유행 이후 지속되는 글로벌 공급망 붕괴, 물류 대란 등으로 수익성 악화와 경쟁사의 추격이 매섭게 이어지고 있다.
불확실성을 해소하려면 강력한 리더십과 과감한 투자가 병행돼야 한다. 삼성전자는 모두 부재한 상황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태로 리더십을 상실한 지 수년이 흘렀다. 이 기간에 경쟁사는 대규모 인수합병(M&A)으로 몸집을 불렸고,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설비 투자를 단행하며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벌리거나 좁혔다. 130조원에 달하는 현금과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도 결정을 내릴 리더십 부재로 대규모 투자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예전처럼 총수 1인에 의해 기업이 운영되는 시절은 지났다. 하지만 총수에게 있는 강력하고도 확고한 리더십은 기업 미래를 좌우하는 게 사실이다. 최근 SK는 12년 만에 현대차를 제치고 재계 2위로 올라섰다. 최태원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 아래 반도체, 바이오 등 신수종 사업에 아낌없이 투자한 결과다. 연간 실적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전문 경영인이었다면 불가능했다. 이병철 삼성전자 전 회장의 반도체 사업과 이건희 전 회장의 바이오 사업 시작도 모두 총수 리더십에서 출발했다.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 5단체는 5월 8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이재용 부회장을 포함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 등 주요 기업인의 사면·복권을 요청했다. 단순히 자유의 몸으로 풀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기업인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기회를 달라는 절박함이 묻어 있다. 불확실성을 예측 가능성으로, 불안을 확신으로 바꿔 줄 첫 단추는 리더십 회복에 있다.
정용철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