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직 변호사의 DX문화살롱](11)디지털 시대, 쓸모없는 것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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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맹상군은 진(秦)나라에 외교사절로 갔다가 감금됐다가 왕의 후궁에게 여우가죽 옷을 뇌물로 바치고 탈출했다. 여우가죽 옷을 구하는데 도둑질을 잘하는 식객의 도움을 받았다. 동이 트기 전에 진나라 국경 문을 여는 데는 닭울음을 잘 내는 식객의 도움을 받았다. 쓸모없는 사람의 쓸모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1969년 3M의 연구원 스펜서 실버는 접착제를 만들었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접착력이 떨어져서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 다른 연구원이 스펜서의 연구를 활용해 책에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는 종이를 만들었다. 그것이 포스트잇이다.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는 사람의 단순·반복 업무부터 인공지능(AI)에 뺏길 가능성이 짙다. 정신노동을 한다고 방심하진 말자. 인공지능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정신활동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다루는 고급 일자리가 늘겠지만 기존의 많은 일자리가 사라진다. 언제 권고사직, 명예퇴직을 할지 모른다. 실력주의 사회에선 일자리가 없으면 무능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몸과 마음이 위축된다. 유능한 임직원만으로 기업이 살아남고, 공동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쓸모란 무엇인가. 쓸모가 없으면 사람이 아닌가. 살 가치가 없는 걸까. 거친 음식을 씹는 것은 이빨의 역할이다. 잇몸이 없어도 가능할까. 남우주연상 영화배우 황정민을 만들기 위해선 연출 및 촬영감독, 조연, 작가, 의상, 소품, 섭외, 편집, 디자인, 투자사, 배급사가 있어야 한다. 웅장한 교향곡을 연주하려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만이 아니라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챙' 하고 단 한 번의 울림으로 활력을 주는 심벌즈가 있다. 심벌즈의 침묵도 연주다. 큰 침묵 속에 큰 울림이 있다. 기업이 일자리를 줄이고 있다. 기업에 취업했다면 그저 그렇게 살았을 사람이 창업시장에 나오고 있다. 상사의 지시를 받지 않으니 마음껏 아이디어를 펼치고 있다. 기업에 있으면 없어졌을 사업도 고개를 들고 있다. 어두운 방구석에서 게임기를 두들기던 사람이 게임개발자가 되고 온라인 영웅이 되고 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무엇이 되라, 누구처럼 되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다. 쓸모를 가르치는 사회다. 사회가 정해 준 쓸모 때문에 우리 스스로 쓸모를 녹슬게 하고 있는지 곰곰이 봐야 한다. 신은 무능한 자를 세상에 내놓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쓸모를 찾자.

우리가 자녀를 낳을 때 세상에 쓸모가 있기를 바란다. 간혹 나의 노후를 책임져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아내는 아이가 태어나 곁에 있어 준 것만으로 평생 해야 할 효도를 다했다고 한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 왜 나에게서 쓸모를 따지는가.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말했듯 같아서 평등하고 달라서 동등하다. 사람의 쓸모를 따지는 것은 죄악이다. 신은 무능한 자를 세상에 내놓지 않는다.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다. 사람의 쓸모를 따지고 유능함과 무능함을 나누는 것은 문명이 만든 죄악이다. 당근 마켓을 보자. 버려질 것들의 천국이다. 쓸모없는 것도 사랑스럽다. 얼마 전 제주도 출장을 다녀왔다. 호텔 주위에 넓은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자신을 봐 줄 누군가를 찾는지 이름 없고 초라한 풀이 흙길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들이 모여서 군락이 되고, 숲이 되었다. 어찌 몸통 굵고 곧게 솟은 나무만의 쓸모였겠는가. 그들이 모여서 제주도가 되고, 한국이 됐다. 어찌 그들을 쓸모없다 할 수 있을까. 다시 봐도 사랑스럽다.

인공지능 시대라고 그들의 일자리를 뺏을 수 있을까. 뺏는다고 뺏기지도 않는다. 미래 한국을 위해 일자리를 양보한 것은 아닐까. 양보한 것에는 대가가 있어야 한다. 디지털 대전환의 성과를 골고루 나누는 것만이 해답이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나는 인공지능을 변호한다' 저자) sangjik.lee@bk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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