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Image
<1970년 8월 이재철 과학기술처 차관(왼쪽)과 정근모 박사(왼쪽에서 두 번째)가 미국 국제개발처의 한국과학원 설립 타당성 조사를 위해 입국한 프레데릭 터만(왼쪽에서 세 번째) 박사를 영접하고 있다. <정근모 박사 제공>>

“한국과학원 설립은 과학기술처가 맡아서 추진하시오.” 박정희 대통령의 이 말에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이 대답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1970년 4월 8일 박 대통령의 지시 이후 한국과학원 설립은 과학기술처의 최우선 과제로 등장했다. 과학원 설립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과학원 설립 숙제를 넘겨받은 김기형 장관은 즉각 후속 조치에 나섰다. 우선 경제기획원에 공문을 보내 미국 측에 기술원조자금 지원에 따른 조치를 요청했다. 원조자금 지원은 한국과학원 설립의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었다. 당시 김학렬 경제부총리와 김기형 장관은 과학기술 인재양성 정책에 손발이 잘 맞았다.

1970년 5월 12일. 과학기술처의 요청에 따라 경제기획원은 김학렬 경제부총리 명의의 한국과학원 설립에 필요한 500만달러 장기저리 교육차관 제공 요청서를 존 해너 미국국제개발처(USAID) 처장에게 발송했다. 경제기획원은 과학기술처가 마련한 한국과학원 법안과 과학원 설립 계획서도 함께 보냈다. 기술원조 자금 500만달러는 과학원 연구실험 시설, 도서 구입, 교환 교수 유치 등에 사용할 방침이라는 점도 명확히 밝혔다.

한국 정부의 요청서를 받은 USAID 측은 1차로 한국과학원 설립 가능성 검토를 위해 조사단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조사단이 제출한 보고서를 검토해 자금 지원 규모를 최종 결정키로 했다. 2개월여 후인 7월 17일. 한국과학원 설립 타당성을 조사하기 위해 정근모 박사와 미국 오리건대 대학원장을 지낸 도널드 베네딕트 박사가 선발대로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정근모 박사의 회고록 증언. “1970년 3월 일시 귀국해 4월 8일 당정협의회에서 한국과학원 설립안을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보고한 후 나는 뉴욕공대로 돌아갔다. 그 후 조사단에 참여해 달라는 USAID의 요청을 받았다. 당시 나는 30살의 새파란 뉴욕공대 부교수였다. 그러나 한국과학원 설립을 처음 제안했고 기초 보고서를 USAID와 정부에 제출한 관계로 조사단 선발대로 뽑혀 3개월여 만에 다시 귀국했다. 도널드 베네딕트 박사와 함께 선발대로 왔다.”(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

선발대가 한국에 도착한 날은 국회가 한국과학원 설립을 통과시킨 이튿날이었다. 조사단이 한국에서 지원 타당성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정부는 과학원법을 제정해 과학원 설립의 강력한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선발대가 도착한 김포공항에는 권원기 과학기술처 인력담당관이 나와 이들을 맞이했다. 선발대는 서울 조선호텔에 머물면서 각종 기초 자료를 수집했다.

8월 초 조사단 본진 3명이 한국에 도착했다. 이날 공항에는 이재철 과학기술처 차관과 정근모 박사가 나와 조사단 본진을 영접했다. 조사단은 미국 과학기술계를 대표하는 최고 과학자들로 구성했다. 단장인 프레데릭 터만 박사는 미국 스탠퍼드대 부총장이고 조사 단원인 토머스 마틴 박사는 서던메소디스트대 부총장이었다. 두 사람은 전자 분야의 전설적인 인물로 통했다. 코넬대 부총장을 지낸 프랭클린 롱 박사는 미국 최고의 화학자였다. 마틴 부총장은 조사단 활동 후 1974년부터 1987년까지 14년간 시카고에 있는 일리노이공대 총장을 지냈다.

롱 박사는 미국 군축청 부청장을 지냈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미국과학재단 총재로 지명한 인물이다. 롱 박사는 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원자탄 개발을 이끈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화학 분야를 담당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과학기술자의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고, '과학기술과 사회' '과학기술을 개발도상국 발전에 활용하는 방법' 등을 연구했다.

조사단장인 터만 박사는 나중에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불리며 혁신 아이콘으로 통했다. 스탠퍼드대 화학과를 졸업한 뒤 전자공학으로 전공을 바꿔 모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매사추세츠공대에서 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대 공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자신이 개발한 진공관 회로장치 관련 산·학 협력 연구 과정을 운영해 대학을 세계적인 명문으로 육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적의 레이더를 무력화하는 장치를 개발하기도 했다. 스탠퍼드대에서 공대 학장과 부총장을 지낸 그는 산·학 협력 모델도 만들었다.

제자인 빌 휼렛과 데이비드 패커드는 휴렛팩커드(HP)를 공동 창업했다. 터만 박사는 1951년 스탠퍼드대 부지에 '인더스트리얼 파크'를 조성해서 휴렛팩커드와 이스트먼 코닥, 제너럴 일렉트릭, 록히드 등 당대의 하이테크 기업을 입주시키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인더스트리얼파크는 세계 정보기술(IT) 산업 중심인 실리콘밸리의 발상지가 됐다. 쟁쟁한 과학자들로 구성된 조사단은 일명 '터만 조사단'으로 불렸다.

터만 단장에 대한 정근모 박사의 증언. “과학기술과 혁신, 창의력이 어떻게 한 나라의 국력을 기르고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사례가 터만 박사의 발자취다. 그는 실리콘밸리의 아버지이자 혁신 아이콘으로 불린 과학기술 교육행정 전문가였다. 그의 영향을 받아 한국 과학기술계에도 혁신 바람이 차츰 불기 시작했다.”

터만 박사는 정 박사에게 과학자로서, 인생 선배로서 많은 가르침을 준 멘토 중 한 명이었다. 터만 조사단은 9월 10일까지 한국에 머무르면서 한국과학원 설립의 타당성을 조사했다. 과학기술처 인력담당관실은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권원기 전 과학기술처 차관의 말. “조사단이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이들에 대한 지원에 인력담당관실 직원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국과학원 설립과 관련한 각종 자료를 수집해서 조사단에 제공하고, 국내 정부기관과 기업·연구기관 인사들과의 면담을 추진했습니다. 조사단이 활동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행정 지원에도 만전을 기했습니다.”

조사단은 한국과학원의 △발전 방향과 역할 △시설과 투자 규모 △기구와 조직 △산업계와 과학기술계 연계 방안 △한국과학원에 대한 미국 자매기관의 지원 사항 등을 세밀하게 조사하고 설립 여부를 검토했다. 조사단은 경제기획원·문교부·과학기술처를 비롯해 주한 미국 관련 기관과 서울대·고려대·연세대·서강대·한양대·경북대·영남대 등 교육기관, 대한상공회의소·전국경제인연합회·삼성전자·금성사·포항제철·이천전기·대한전선·강원산업·한국전력·대한석유공사 등 산업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원자력원, 정밀기기센터, 바텔연구소 등을 방문해서 관계자와 면담했다.

조사단은 날마다 일정이 끝나면 모여 토론하고, 조사 내용을 정리했다. 권원기 전 차관의 회고. “우리는 터만 조사단을 안내해서 한국과학원 입지 후보지 중 한 곳인 대전 유성구 도룡동 일대도 둘러봤습니다. 나중에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선 이곳은 당시 그저 황량한 들판이었습니다. 저는 터만 조사단에 '이곳에 한국과학원을 비롯한 국내 유수 연구소가 입주하면 연구 집결지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이날 우리는 조선호텔에서 특별히 주문한 샌드위치를 조사단에 대접했습니다. 당시 유성에서 식사할 곳이 없었어요. 조사단은 한국과학원 설립에 아주 긍정적이었습니다.”

조사단은 선발대가 작성한 중간보고서를 자세하게 검토해서 이를 승인하고 8월 21일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제출했다. 조사단 간사인 정근모 박사는 자료조사와 보고서 작성을 도맡았다. 그는 한국과학원 설립의 제안자에서 조사단을 거쳐 나중에는 산파역까지 담당했다.

중간 보고서의 핵심은 과학기술 특수대학원인 한국과학원 설립을 지지하고, 450만달러를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한국과학원 설립 시 전문가 지원과 실험실 설립계획, 주미 연락조정실 운영 등도 보고서에 넣었다. 정근모 박사가 제안했던 학과 구성과 교과 과정, 학교 건물 배치 방안도 중간보고서에 포함시켰다. 터만 조사단 5명은 9월 10일 미국으로 떠났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