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1만5000명이 넘는 국민이 우울증으로 자살하지만 환자는 마땅히 치료받을 의료진을 찾기도 진료 예약도 쉽지 않다. 자폐증,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공황 장애, 조현병 등 400만명에 가까운 정신질환 환자는 유명한 의사의 진료를 받으려면 최소 수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진료를 받아도 한 시간 남짓 상담을 마치면 2주 정도는 기다려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디지털 치료제 역할이 아쉬운 대목이다.
◇디지털 치료제의 출현과 성장
1세대 저분자 화합물(알약, 캡슐)과 2세대 생물제제(세포, 유전자)를 이은 차세대 의약품으로 기대되는 디지털 치료제는 '질병이나 장애를 예방·관리·치료하기 위해 환자에게 제공되는 의학적 근거 기반의 소프트웨어'로 정의된다. 디지털 치료제는 의료시스템으로 불가능한 일상생활에서 질병 치료와 관리 기능을 제공할 수 있어 주목된다. 병원에 가기 위해 긴 시간을 소모하고, 저명한 의사를 만나기 위해 수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환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2017년 페어 테라퓨틱스의 마약중독 치료용 소프트웨어 '리셋'을 의약품으로 승인한 이후 디지털 치료제는 관심 대상이 됐다. 20여개 FDA 승인 제품을 포함해 200여개가 전 세계에서 개발되고 있다. 주요 분야로는 아킬리 인터랙티브(ADHD), 코그노아(자폐증), 클릭 테라퓨틱스(우울증), 디테라(치매), 팔로알토(공황장애), 에임메드(불면증) 등이 정신질환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웰독(당뇨), 프로펠러헬스(천식), 라이프시맨틱스(호흡기장애) 등은 만성질환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이외에도 암과 통증 관리 솔루션 등이 개발되고 있다. 이 추세라면 모든 질병이 디지털치료제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쟁력
디지털 치료제는 정보통신 기술과 의학 전문성의 융합체다. 데이터 분석 기술(빅데이터, 인공지능), 통신 기술(5G, 블루투스, 인터넷), 디스플레이 기술(가상현실, 증강현실), 사물인터넷 기술(센서, 반도체), 보안 기술(비식별화, 암호, 인증), 시스템 기술(데이터 관리, 플랫폼)이 총동원되어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우수한 정보통신 기술과 인프라를 갖추고 의학 분야에서 임상 경험이 풍부한 우리에게 적합한 산업이다.
2020년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발 빠르게 '디지털 치료기기 허가·심사 가이드라인'을 발간하고 불면증(웰트, 에임메드), 시야 장애(뉴냅스), 호흡기 질환(라이프시맨틱스) 등 질환을 치료하는 솔루션에 임상시험을 허가했다. 2022년에는 우울증 디지털 치료제 등이 임상시험에 돌입할 전망이다. 내년에는 우리나라도 디지털 치료제가 시장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 비해 늦게 출발했지만 충분히 경쟁할 만한 능력과 기술을 갖추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문화체육관광부 등도 앞다투어 디지털 치료제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정부의 집중 투자가 무늬만 전문기업을 양산하는 단점도 있지만 디지털 치료제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1000억원이 넘는 연구개발(R&D) 투자와 정부 지원이 임상시험과 상용화를 조건으로 하고 있어 가시화된 성과물이 기대된다.
◇시장 전망
블루오션이다. 그랜드뷰리서치는 2028년까지 191억달러(약 22조원), 프로스트&설리번은 2025년까지 89억달러(약 11조원),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2026년에 96억4000만달러(약 12조원) 규모 시장을 형성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시장은 이보다 빨리 성장하고 있다. 대다수 디지털 치료제 기업은 매출은 없지만 풍부한 투자에 의존해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시장 활성화가 예견되지만 관건은 누가 먼저 시장의 문을 여는가에 있다. 글로벌 선두기업인 페어테라퓨틱스는 2021년 이제 겨우 550개 병원에서 1만4000개의 처방으로 500만달러(약 50억원) 정도의 매출에 머물러 있다. 아직은 열리지 않은 시장이라고 해석되는 이유다.
◇이슈와 해결방안
풀어야 할 숙제도 만만치 않다. 효용성과 안정성이 검증된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 정보통신기술(ICT)을 이용해 맞춤형 치료, 실시간 데이터 분석, 정보보호 기능을 제공하고 플랫폼 기반 서비스를 위한 표준안 마련도 시급하다. 기존 의료서비스의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하다. 시장 확대를 위해 디지털 헬스와 의료 분야의 접점을 찾아야 한다. 처방전이 없어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현 의료 체제에서의 과감한 혁신이 논의되어야 한다. 보험 수가만큼 접근성과 편리성은 중요한 요소다.
미국은 비영리기관인 디지털 치료제 협회(Digital Therapeutics Association)를 결성해 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디지털 치료제를 앞세운 커뮤니티가 난립하기 이전에 대표 커뮤니티가 꾸려져서 기술과 산업을 이끌어야 한다. 이를 통해 제도의 개선, 표준의 제정, 지불 체계 개선, 글로벌 진출, 사업 모델과 기술의 공유 등 산적한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맺음말
디지털 치료제 시장 활성화의 길은 가깝게 보이지만 먼 길이다. 1990년대에 이해관계의 득실을 계산하며 전자상거래 도입이 늦어지는 동안 아마존 등의 독주가 시작되었고, 인터넷 사업은 구글·페이스북·애플·넷플릭스 등 미국 기업이 독식하고 있다. 디지털 치료제 산업은 정부와 기업, 국민이 합력해서 발전시켜야 할 미래의 먹거리다. 먼저 규제를 해소하고 시장의 족쇄를 풀면 글로벌 진출의 지름길을 발견할 수 있다. 디지털 치료제 산업은 단순한 부의 축적을 넘어 세계 의료시장을 지배하고 정보통신 강국의 면모를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성균관대 소프트웨어학과 정태명 교수 tmchung@skku.edu
○정태명 교수는...
미국 퍼듀대에서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에 돌아와 26년간 정보보호 연구와 교육에 종사했다. 안전한 대한민국 전자정부 구축에 참여하고 OECD 정보보호분과 부의장으로 정보보호의 국제화에 앞장섰다. 현재 디지털 치료제 전문기업 히포티앤씨를 창업해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