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이 시대 해커 정신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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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올해는 우리나라에 인터넷이 도입된 지 4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1982년 전길남 교수가 처음 인터넷을 도입해서 개발한 이래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를 갖추고, 뛰어난 인터넷 기업도 갖게 됐다.

벤처 스타트업을 연구하고자 인터넷 비즈니스 역사와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다가 '해커, 광기의 랩소디'(Hackers:Heroes of the computer revolution)라는 책을 보게 됐다. 미국 컴퓨터 역사를 논할 때 항상 언급되는 이 책은 와이어드 수석 기자였던 스티븐 레비가 썼다. 왜 미국 컴퓨터 역사를 대표하는 책 제목에 해커라는 단어가 들어갈까.

우리에게 해커라고 하면 컴퓨터를 잘 쓰는 광기 어린 천재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해커는 정부나 금융기관으로부터 정보를 빼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책에서 이야기하는 해커는 괴상하고 비정상적인 컴퓨터 코드를 작성하는 프로그래머라기보다는 모험가, 선구자, 위험을 감수하는 예술가로 보고 있다. 초기 해커는 대형 기관이 독점하는 정보를 평범한 시민들도 갖게 돼 평등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195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Tech Model Railway Club(TMRC) 동아리 학생들은 기차 모형의 전기 시스템을 연구하면서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기기였던 IBM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쓰게 됐다. 이들은 한 번에 한 시간만 사용해야 하는 고가의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게임용으로 쓰기 위해 게임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당연히 이렇게 개발된 게임 소프트웨어(SW)는 메인프레임 컴퓨터의 본래 목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학생들은 메인프레임 컴퓨터의 전체 작동원리를 알 수 없었다. 이들은 게임 개발을 하는 해킹 과정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서로 무료로 나누는, 이른바 해커 윤리를 만들었다. 중앙집중형으로 관리되던 메인 프레임 컴퓨터를 점차 누구나 디버깅하고 개선할 수 있는 개방형 시스템으로 변화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1970년대 후반 캘리포니아에서는 개인용 컴퓨터(PC) 개발이 한창이었다. 기존 대형 컴퓨터는 시스템 사용도 어렵고 자유자재로 고치기 어려웠지만 PC는 제약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영화 '잡스'를 통해 잘 알려졌듯이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은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 참가했다. 해커는 새로운 형태의 PC를 만들기 위해 장비, 회로도, 소스 코드 등 관련 지식과 정보를 공유했다. 이후 기업이 PC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하면서 해커 윤리는 퇴색했고, 시장이 빠르게 상업화되면서 지식과 정보는 더이상 공유되지 않았다.

1980년대 아타리 게임기나 Apple II가 만들어진 후에 컴퓨터 게임들이 출시됐다. 시대를 앞서가려면 컴퓨터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고가의 PC를 구입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 컴퓨터를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게임 SW는 컴퓨터를 게임기로 만들어 줬다. 실력 있는 개발자가 파트 타임으로 만들기 시작한 게임 프로그램은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사업가는 게임을 상품화했다. 게임 SW 시장이 커지면서 게임 회사도 만들어지고, 이전의 딱딱한 회사 분위기에서 벗어나 캐주얼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책은 수십 년 동안 미국 컴퓨터 역사에서 해커 윤리라는 정신을 포착해 기록했다. 상업화, 자본화 과정을 거치면서 해커 윤리가 쇠퇴하고 소멸하고 있다는 점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와 같이 해커 커뮤니티에 있다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인물을 미국 IT와 게임 역사의 주인공으로 보지 않았다. 해커 윤리를 갖춘 수많은 해커야말로 역사적 변화를 만들어 낸 주역이라는 것이다.

몇 년 전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 있는 컴퓨터 역사박물관(Computer History Museum)을 방문했다. 찰스 배비지의 차분기관부터 최신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IT 장비를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상당한 공간이 게임에 할애돼 있다. 이 책에서 소개된 해커 이야기를 읽다 보면 게임산업이 컴퓨터 발전을 끌어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1990년대 온라인 게임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인터넷 비즈니스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게임산업 현황은 어떠한가. 게임 내 확률형 아이템 정보 공개 의무화, 블록체인과 대체불가토큰(NFT) 기반 게임 규제 등 정부 규제와 공약이 넘쳐나고 있다. 수십년 전에 만들어진 게임법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글로벌 게임 환경과 산업적 측면에서의 진흥을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술 진화에 따른 새로운 사업 기회를 저해하고 있다. 한류 문화가 규제를 통해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것이 아닌 것처럼 과도한 규제나 법 제도가 시대 흐름이나 기술 진화를 가로막을 수 있다.

신기술이 나타나고 사업화되는 과정에서는 해결할 문제가 많기 마련이다. 해커들은 모험가, 선구자, 위험을 감수하는 예술가로서 일부가 독점하는 정보를 누구나 획득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렇다면 게임 내에서 사용자가 만드는 디지털 재화의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인가. 게임 내 재화가 게임 플레이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콘텐츠 사용 경험을 높이게 될 것인가. 사용자 보호를 위한 규제가 자칫 새로운 사업 모델을 만들어 내는 벤처, 스타트업을 포기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이 시대 해커 정신을 다시 생각해 볼 때다.

전성민 벤처창업학회 회장/가천대 경영학부 교수 smjeon@gachon.ac.kr

전성민 교수는…

창업 경험이 있는 대학 교수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경영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천대 경영학부 교수이며, 제15대 벤처창업학회장이다. 윤민창의투자재단 사외이사,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문가 모니터 위원, 게임정책자율규제 평가위원,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자문교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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