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6일 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미국에서 돌아온 지 12일 만에 다시 출장길에 올랐다. 최근 행보는 숨 가쁜 날의 연속이다. 이날 이 부회장은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을 마치고 3시간여 만에 아랍에미리트(UAE)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흘 동안의 짧은 출장길이지만 미국 강행군 뒤 재판을 마치자마자 떠난 야밤 출장이다. 얼마나 다급한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부회장의 바쁜 나날은 삼성 변화에도 속도를 높이고 있다. 8월 출소 후 잠행을 이어 가면서 복귀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최근 행보를 보면 이는 적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변화의 고삐를 바짝 죄기 위한 정교한 준비였다는 것이 확인됐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5년 만에 인사제도를 전면 개편했다. 5년 전 직급체계를 단순화하고 호칭을 통일한 데 이어 이번에는 전무 직급을 없애고 동료평가와 절대평가도 처음 도입했다. '일하면서 성장하는 문화'와 '공정한 보상'을 내건 삼성의 인사 변화는 이 부회장 복귀 후 첫 사내 정비 신호탄이었다. 이후 미국 출장길에 오른 이 부회장은 버라이즌, 모더나,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기업들의 경영진을 연이어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모처럼 파트너를 만나 회포를 풀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들의 혁신과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며 위기감을 체감했을 것이다. 미국 출장을 마치고 귀국한 날 이 부회장이 던진 '냉혹한 현실'이란 화두가 이를 증명한다.
냉혹한 현실 앞에서 삼성은 변화를 택했다. 총수가 밤늦게 출장길에 오른 이튿날 삼성전자는 파격의 승진 인사를 단행했다. 지난 2018년부터 이어진 김기남·김현석·고동진 대표이사 체제를 깨뜨리고 새 인물을 발탁했다. 이들은 이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태로 손발이 묶여 있는 동안 반도체·가전·모바일 사업 부문을 이끌며 사상 최대 실적 성과를 이룬 인물이다.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대외 불확실성을 고려했을 때 안정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또 다른 실험을 예고했다. 아버지 1주기 기일에서 제시한 '뉴 삼성'의 비전은 그동안 사법 리스크에 갇혀 변화의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을 감안, 내부 혁신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로 귀결된다.
이 부회장의 행보에 삼성 혁신의 시계추도 빨라지고 있다. 인사제도, 조직 개편 등 내부 정비와 함께 연이은 네트워크 강화로 조직이 활기를 띠고 있다. 그동안 삼성은 책임경영을 강조하며 능력 있는 전문경영인이 사업 부문을 이끌어 왔다. 안정 속에서 성장을 거듭했지만 반도체 투자 등 굵직한 사안은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부회장 출소 후 4개월여 만에 대변화가 일고 있다. 그룹 총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는 대목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나라 오너 대기업이 안고 있는 리스크가 여전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정용철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