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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1월 28일 박정희 대통령(왼쪽 다섯 번째)이 청와대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과학자들과 만나 환담을 나누고 있다. 왼쪽 네 번째는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초대 소장.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1967년 10월 23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이날 세 차례 심층 면접을 거쳐 선발한 해외 과학자 가운데 1차로 18명을 연구원으로 채용했다. 훗날 한국 과학계를 이끈 주역이자 대한민국 1호 '유치 과학자들'이다.

이들 18명은 △심문택 △한상준 △정만영 △천병두 △양재현 △최종완 △윤용구 △최상 △조종수 △정원 △김재관 △김종빈 △오동영 △김은영 △정종낙 △윤한식 △이찬주 △이종옥씨 등이다.

분야별로는 화학공학을 비롯해 금속공학, 화학, 기계공학, 식품공학, 조선공업, 경제, 전기공학 등을 전공한 학자들이었다.

연구소는 이들을 자매연구소인 미국 바텔기념연구소에 보내 단기 연수를 받도록 했다. 연구소는 1966년 6월 바텔기념연구소와 △기술연구소 설립업무와 건설계획에 대한 지원 △책임급 연구원 충원과 훈련에 관한 지원 등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이들은 바텔기념연구소에서 계약연구기관에 대한 노하우를 배우는 일에 집중했다.

한상준 박사(전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의 초창기 증언.

“바텔기념연구소에서 계약연구기관 노하우를 배우는 일에 몰두했다. 연구에 실제 필요한 장비는 무엇인가, 연구과제의 타당성 조사는 어떻게 하는가 등에 중점을 두고 배웠다.”

해외 과학자에 대한 처우는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이 원칙을 정해서 이들에게 제시한 바 있다. 그 원칙은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한다 △연구의 안정성을 보장한다 △봉급과 주택을 제공하고 자녀 교육 대책을 마련해 준다 등이다.

이 같은 원칙에 따라 최형섭 소장은 유치 연구원들에 대한 봉급 기준을 책정했다. 그러나 이 금액은 국내 연구자들이 볼 때 깜짝 놀랄 고액이었다.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의 회고록 술회.

“유치한 연구원들은 주로 미국에서 유학한 과학자가 많았기 때문에 미국에서 받던 봉급을 기준으로 그곳에서 받던 4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돈을 한화(韓貨)로 지급하도록 했다. 만일 물가가 오르면 그만큼 가산한다는 원칙 아래 당시의 한국 물가를 감안해서 봉급을 정했다. 그런데 이 월급은 당시 국내 국립대학교 교수 월급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당시 국립대 교수 월급은 3만원 정도였다. 더욱이 연구소 연구원들에게 주택까지 제공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최고 엘리트 집단인 대학교수들이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반발했다.

그해 11월 어느 날. 이량 서울대 공대학장이 최형섭 소장을 찾아왔다. 이량 학장은 최형섭 소장과 함께 공군에 입대했고, 경제과학심의회의에서도 함께 일했다. 두 사람은 연구소 설립준비위원회에서 위원으로 일한 막역한 사이였다.

“어서 오시오. 무슨 일이 있소?”

이량 학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최형섭 소장에게 연구원 봉급 문제를 따져 물었다.

“최 소장, 이게 타당한 일이오? 이건 사회적인 문제요.”

최형섭 소장은 조곤조곤 이유를 설명했다.

“이 박사, 교수들이 지금 충분한 월급을 받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오? 내가 연구원들한테 주는 월급은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연구에 전념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최저 금액이오. 결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금액이 아니라고 보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최형섭 소장의 말에 이량 학장은 듣기만 했다.

“이 박사, 다른 사람이 많이 받는 월급을 깎을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월급을 더 많이 받는 수준으로 인상하도록 노력하는 게 타당한 일이 아니겠소. 나한테 와서 따질 일이 아니라 문교부 장관한테 가서 기술연구소 연구원에 비해 대학교수 월급이 턱없이 적으니 그 차이를 시정해 달라고 건의하는 게 이치에 합당한 일이 아니오?”

이량 학장은 최협섭 소장의 말에 수긍한 듯 “당신 말이 옳은 것 같소”라고 말했다. 이후 이량 학장은 두 번 다시 최형섭 소장에게 연구원 월급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해 12월 말 초대 연구소 전산실장으로 임명된, 전 동명대 총장 성기수 박사의 첫 월급이 10만원이었다. 당시 성기수 실장의 나이 34세. 그의 이력은 당시 화제였다. 집안이 가난해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1961년 미국 유학을 떠나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2년 1개월 만에 석·박사 학위를 받는 등 한국인의 위상을 높였다. 이는 하버드대 300년 역사에서 최단 기록이라고 한다.

성기수 박사의 회고.

“귀국 후 당시 나는 공군 대위로 공군사관학교 교수부 교관이었어요. 당시 월급이 2만원이었어요. 생활이 어려워 서울대 공대·상대와 행정대학원에서 시간강사를 하고, 한국경제개발협회 등 모두 다섯 곳에서 일을 했어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전산실장에 임명되고 나니 월급이 다섯 곳에서 받은 돈보다 더 많았습니다. 당장 다른 일을 그만뒀어요. 당시 연구소는 최고 선망의 직장이었어요.”

연구소는 고액 급여에다 기혼자에게 주택도 제공했다. 해외에서 귀국하는 연구원들은 이사비용도 지원받았다.

성 박사의 이어진 증언.

“연구소에서 시설이 좋은 주택을 제공하더군요. 관리비도 다 연구소가 부담했습니다.”

김은영 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의 연구소 초창기 증언.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자 은사인 심정섭 서울대 교수가 조교수로 채용할 테니 빨리 오라고 해서 돌아왔는데 교수 임용이 쉽지 않았어요. 6개월여 시간강사를 하던 중 최 소장의 권유로 연구소로 왔습니다. 성기수 박사와 바텔기념연구소에서 6개월간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초창기 월급이 대학교수 3배 정도였어요. 대학교수들이 연구소로 오고 싶어 했습니다.”

안영옥 박사의 당시 증언도 이와 일치한다. 미국 아이오와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안영옥 박사는 세계적인 연구소 듀폰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 합류했다. 초기에 그가 받은 월급은 8만1000원이었다. 이는 듀폰에서 받던 월급의 30% 정도였다.

“그런데도 월급이 박정희 대통령보다 많았어요. 박 대통령 월급이 당시 7만원선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해외 유치 과학자들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액 봉급에다 주택 제공, 당시로서는 파격인 의료보험 혜택까지 지원했다. 해외 과학자들의 자녀 취학이 문제가 되자 이 문제도 해결했다.

1968년 4월 17일, 청와대는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이후락 비서실장 명의로 문교부에 '해외 과학자 입국에 따른 자녀 취학 조치'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냈다. 자녀 교육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부모들의 관심사다. 과학자 자녀들이 국내 학교에 취학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니 이를 해소하라는 지시였다. 문교부는 이에 따라 해외 과학자 자녀들이 원하는 지역 학교에 취학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연구소 연구원에 대한 고액 월급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았았다. 급기야 고액 월급이 부당하다는 진정서가 청와대로 들어갔다.

어느날 청와대에서 최형섭 소장에게 연구소 봉급 명세서를 가지고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최형섭 소장이 청와대로 들어갔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최형섭 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무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최형섭 소장 간에 오간 대화를 재구성하면 아래와 같다.

“어서 와요.”

“각하, 이게 연구소 봉급표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봉급표를 쭉 살펴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과연, 나보다 월급이 많은 사람이 수두룩하군.”

최형섭 소장이 심호흡을 한 뒤 작심 발언을 했다.

“각하, 만약 이런 월급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시면 제 월급만 깎아 주십시오.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말을 듣고 한참 봉급표를 보더니 서류를 덮으며 결론을 말했다.

“이 봉급표대로 그대로 집행하시오.”

박정희 대통령의 이 말 한마디로 연구원 봉급 논란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막을 내렸다.

최형섭 소장은 그해 열린 이사회에 연구소 봉급표를 제출했다. 최형섭 소장은 자신의 봉급은 연구원 최고 호봉에서 1000원만 더 많은 금액으로 책정했다.

이사회에는 당연직 이사로 참석한 토머스 버트럼 바텔기념연구소 소장이 이를 보고 말했다.

“최 소장의 경력만 봐도 최고 호봉인 연구원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아야 하는데 1000원만 더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로 인해 최형섭 소장 월급은 이사회에서 다시 책정했다. 연구소는 이 무렵 국내 샐러리맨들에게는 꿈의 직장이었다.

1967년 11월 28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오후 4시 청와대에서 해외에서 귀국한 과학자들을 접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연구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나서 “15년 안에 우리 과학기술이 일본을 능가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흡한 연구계약제도가 있다면 규정을 고쳐서라도 연구 활동을 충분히 지원하고 보장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관계 장관에게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또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해외 과학자 유치에 필요한 여건을 마련하는 특별조치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과학기술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열정을 재삼 확인한 연구원들은 사기충천(士氣衝天)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