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산 장비 등 사용한 국내업체에
해외기업, 소유권 주장 사례 늘어
명확한 규정 없어 혼란·피해 가중
국회 계류 법안 신속한 통과 요구
#국내 반도체 업체 A사는 최근 생산효율 향상과 신규 서비스 창출을 위해 자사 설비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분석하려 했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A사에 설비를 공급한 해외 업체가 '영업비밀'을 이유로 데이터 분석과 관련한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A사는 자사 라인에서 축척한 정형·비정형 데이터를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소유권마저 고스란히 해외 업체에 넘겨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아 아연실색했다.
국내 기업들이 다양한 현장에서 생성한 '산업데이터'가 무방비로 해외에 유출되고 있다. 산업데이터에 대한 명확한 법 규정이 없어 우리 기업이 축적한 산업데이터를 해외 기업이 무단 점유하거나 거꾸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산업데이터에 대한 정의와 사용·수익권 등을 규정한 '산업 디지털전환(DX) 및 지능화 촉진법'은 수개월째 국회에 묶인 상태다. 국내 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국내 산업의 DX를 확산하기 위해 국회가 조속히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19일 산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산업 디지털전환 및 지능화 촉진법'이 9개월째 국회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해당 법안은 산업데이터에 대한 법적 불확실성을 해소해 DX와 지능화를 촉진,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발의됐다. 지난해 11월 해당 상임위인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 상정된 이후 현재까지 법 효용성에 관한 논란과 토론만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법안이 국회에 묶여 있는 사이 우리 기업들의 혼란과 피해는 가중되고 있다. 산업데이터를 처음 생성한 기업의 권리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특정 기업이 다른 기업의 데이터를 사용해도 불법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이 때문에 우리 기업이 해외 업체들에 '눈 뜨고 코 베이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최근 한 국내 기업은 과거에 이용했던 외국계 클라우드 업체에 당시 축적한 데이터 다운로드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해당 업체는 계약이 만료됐다는 이유로 이 같은 요구를 거절했다. 국내 기업은 자사 데이터가 서버에 존재하는지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어 애태우고 있다. 계약 기간 종료 후 산업데이터의 보관·활용에 대한 명확한 규범이 없는 한 이 같은 사례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DX 가속화로 산업데이터 가치가 높아지면서 소유권 분쟁이 늘고 있다”면서 “기업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사용 권리를 규정한 법 기반이 필요하다”고 토로했다.
산업계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한층 안전하고 원활한 산업데이터 활용 환경을 보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존에 경직된 소유권 개념에서 벗어나 DX에 맞춰 산업데이터 사용·수익권 및 제3자 공유권 등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재훈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변호사는 “해당 법안은 산업데이터 활용 활성화를 위한 정부 지원을 의무화한 것은 물론 우리 기업의 산업데이터가 해외에서 적절히 보호되도록 국외 이전을 제한하는 규정도 담았다”면서 “기업들이 이를 바탕으로 생산효율 향상, 안전성 강화, 생산 공정 혁신, 데이터 표준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국회 산자위는 오는 21일 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열고 산업 디지털전환 및 지능화 촉진법에 대한 네 번째 법안 심사를 진행하려 했지만 소위 일정은 순연됐다.
윤희석기자 pione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