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사 유출해도 '불법' 규정 어렵고
증명 방법 마땅찮아 권리 포기 하기도
혁신 아이디어 있어도 사업화 속도 못내
사용료 가이드라인 없어 '부르는 게 값'

Photo Image

# '산업데이터'가 기업 디지털전환(DX)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떠올랐다. 다양한 산업 현장에서 축적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생산효율 강화, 신산업 진출 등에 활용하는 기업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작년 10월 산업데이터 개념과 권리 등을 규정한 '산업의 디지털 전환 및 지능화 촉진법'을 대표 발의했다. 하지만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위원 간 이견으로 법안은 현재까지 계류 중이다. 최근 산업데이터 사용·수익권을 둘러싼 갈등은 급증하고 있다. 산업데이터 관련 권리를 명시한 법적 기반이 없어 기업 간 충돌이 불가피하다. 국회가 DX에 속도를 내는 우리 기업들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법 통과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산업데이터 무단 사용 빈번…대책 마련 시급

산업데이터 소유권을 둘러싼 기업 간 갈등은 국내외로 확산되는 추세다. 다양한 국적의 기업들이 DX를 위해 데이터 기반 사용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객사, 협력사 등이 부정한 방법으로 자사 데이터를 가로채도 '불법'으로 규정할 수 없어 애만 태울 수밖에 없는 모양새다.

국내 기계·철강·자동차 분야 중소기업인 A사는 신제품 개발 데이터와 핵심 부품 데이터가 최대 경쟁사인 B사로 유출된 것을 확인했다. A사의 유압·전장 부품 생산 외주 협력사가 B사에 해당 데이터를 무단으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A사는 B사 신제품이 시장에 나온 후에야 산업데이터가 유출된 것으로 파악했다. 결국 B사와 C사를 상대로 2년째 민·형사 소송을 진행 중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공급망 상 협력기업 간 데이터를 공유하는 관습적 거래 관행이 있다”면서 “무단 데이터 반출이나 데이터 보안관리 소홀에 따라 발생하는 기업간 데이터 가로채기 사례”라고 설명했다.

공정 데이터 수집을 위해 자사 컴퓨터수치제어(CNC) 공작기에 센서를 부착한 제조기업 C사도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센서 공급 기업인 D사가 C사 데이터를 무단으로 가져가 새로운 비즈니스를 계획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C사는 이의를 제기했지만 D사는 제품 서비스 품질 향상을 위한 조치라고 해명했다. 경쟁사에 해당 데이터를 넘길 우려가 있는 가운데 이를 증명할 수 없었던 C사는 해당 데이터 권리를 포기했다.

지리 정보를 제공하는 중국 업체 E사는 최근 식당, 상점 등 이용자 평가 정보를 보유한 F사의 데이터를 자사 사이트 사용자에 제공한 사실이 확인됐다. F사는 이를 부정당경쟁행위라고 주장하며 침해행위 중지와 9000만위안의 배상을 청구했다. 하지만 E사는 서로 경쟁관계가 없는데다 업계 관행이라고 주장했다.

업계 관계자는 “산업데이터 생성과 사용, 대가 산정 등에 대한 기준이 없어 발생한 갈등 사례”라면서 “(산업데이터 관련) 법적 공백이 산업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Photo Image
<ⓒ게티이미지뱅크>

◇韓 기업, 산업데이터 기반 신사업 '언감생심'

산업데이터 권리에 관한 법적 기반 부재는 기업간 분쟁의 불씨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물론 우리 기업들의 신사업 진출 의지마저 꺾고 있다. 여러 기업과 기관이 참여하는 비즈니스 모델은 데이터 소유권이 모호해 사업에 속도를 내기가 어렵다.

G사는 최근 산업부 연구·개발(R&D)에 참여해 인공지능(AI) 적용 데이터 촉진·확산 관련 과제를 진행했다. 하지만 과제 수행을 위해 다른 컨소시엄 참여 업체에 관련 데이터 공유와 클라우드 저장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해당 업체는 고유의 제조 생산 데이터라 다른 기업에 공유하기 어렵다며 제한된 데이터만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추진하는 정부 용역 과제 참여기업 간에도 데이터 유출에 의한 피해를 우려하는 셈이다. 이 같은 데이터 비공개에 따른 기업 간 마찰은 과제 수행 부진으로 이어져 결국 정부 R&D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과도한 산업데이터 사용 대가를 요구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수익권 체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다.

철강 원재료 활용 데이터를 보유한 국내 한 업체는 최근 정보기술(IT) 솔루션 업체에 공정 프로세스 개선을 통한 신규 사업 발굴을 의뢰했다. 그러나 IT 업체는 해당 기업의 산업데이터를 활용해 별도 프로젝트를 진행한 사실이 알려졌다. 원 주문기업이 데이터 공개를 요구하자 과도한 개발데이터 사용료와 소유권을 요구하며 갈등을 빚고 있다.

한국산업지능화협회 관계자는 “산업데이터 권리 범위와 원천 산업데이터 활용에 대한 소유권 등이 모호해 분쟁이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산업계는 '산업 디지털 전환 및 지능화 촉진법'이 제정되면 이 같은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산업데이터 정의부터 사용·수익권까지 명확한 규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훈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변호사는 “해당 법안은 산업데이터의 사용·수익 권리는 물론 활용·보호 원칙도 제시한다”면서 “제조업의 DX를 끌어낼 수 있는 묘수”라고 강조했다.

윤희석기자 pione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