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37주년:기술독립선언Ⅰ] 시스템반도체, 새로운 기회…기술독립은 꾸준함에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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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서초사옥에 전시된 웨이퍼. 박지호 기자 jihopress@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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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국내 반도체 업계에는 시스템반도체 열풍이 불었다. 지난 4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시스템반도체 육성을 언급하면서 중소 팹리스 지원 방안이 나왔다. 시장 상황도 여느 때와 다르다. 세계 곳곳에서 4차 산업혁명 경쟁이 불붙으면서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증강현실(AR) 관련 제품들이 우리 생활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 국내 업체의 시스템반도체 기술독립을 위해 극복해야 할 장벽은 높다. 퀄컴 등 기존 강자들의 기술 우위가 여전하고, 어느새 1800여개까지 늘어난 중국 시스템반도체 업체들의 파상공세도 이어진다. 업계에서는 꾸준한 정책 관리와 국내 시스템반도체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 미래 먹거리를 선점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시스템반도체는 IT 기기 속에서 정보를 연산하고 처리하는 역할을 한다. 빛이나 소리 등 자연 상태의 물리적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변환하기도 한다. 최근 IoT, AI, AR, 로봇 등 첨단 기술이 집적된 IT 제품이 쏟아지면서 시스템반도체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이미 세계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60% 안팎 규모가 시스템반도체일 만큼 쓰임새는 다양하다. 그러나 기술은 고도화하고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강자 삼성전자가 시스템반도체 사업을 차세대 먹거리 사업으로 점찍고 '2030년 시스템반도체 1위'를 천명한 것도 이 이유에서다.

삼성전자는 엑시노스 등 AP뿐만 아니라 빛을 디지털 신호로 변환하는 이미지 센서, 전력을 관리하는 전력반도체(PMIC) 물량을 늘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뇌를 모방한 뉴럴 프로세싱 유닛(NPU) 반도체 개발도 한창이다.

삼성은 시스템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인 파운드리 업계 1위도 노린다. 3나노, 5나노 양산 기술을 앞세워 대만 TSMC를 바짝 뒤쫓고 있다. 내년 상반기부터 EUV 전용 라인도 가동한다.

문제는 열악한 국내 시스템반도체 생태계 전반의 기술독립 여부다.

특히 국내 팹리스 상황은 악화일로다. 2000년대 초반 국내에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시장이 개화한 시절 1세대 팹리스 업체인 코아로직, 엠텍비젼 등은 연 매출 2000억원대를 올릴 정도로 가파른 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지금은 주요 팹리스 상장사 20개 가운데 절반이 적자를 겪고 있다.

이들이 최근 고난을 겪고 있는 주요 이유는 중국의 파상 공세 때문이다. 화웨이의 반도체 자회사 하이실리콘을 앞세운 중국은 지난해 1698개 이상 팹리스들이 약 30~40% 낮은 가격으로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팹리스 시장에서 중국 점유율은 13%였지만, 한국은 1% 미만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다.

한 국내 시스템반도체 패키징 업체 대표는 “중국 기업 주문량이 점진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느낌이 든다”라고 전했다.

대기업에 제한된 수요도 문제다. 스마트폰, TV 등 국내 대표 전자 사업이 성숙기에 접어들었고, 대기업 전자 제품 업체는 각자 필요한 칩을 내재화하면서 사업 구조가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한 팹리스 업계 관계자는 “한 대기업과 거래하면 다른 전자제품 업체와는 거래하기 힘든 국내 시장 사정도 있다”고 전했다.

긍정적인 시장 전망에 비해 국내 팹리스 시장 규모는 답보 상태를 보이자 올해 정부가 팔을 걷어붙였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029년까지 1조원을 투자해 국내 설계 기업을 육성하기로 했다. 공공과 민간 수요와 연계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미래 시스템반도체 업계를 책임질 인력들을 학부생부터 양성한다는 계획이다. 국내 설계 인력 풀은 고갈돼 있지만, 실력은 다른 국가에 비해 뒤처지지 않아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삼성전자도 정부 정책과 보폭을 맞춘다. 10년간 133조원을 투자해 시스템반도체 사업을 육성하면서 국내 생태계 전반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일례로 삼성은 파운드리를 국내 팹리스 업체에게도 개방해 반도체 시제품을 만드는 '멀티프로젝트웨이퍼(MPW)' 사업도 횟수를 늘렸다. 장기적 안목에서 그들의 파운드리 고객사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정부와 대기업의 움직임을 반기면서도 꾸준한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 반도체 전문가는 “시스템반도체 2015 정책 시행 당시에도 내용은 좋았지만 규정을 유동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중심축이 없어 지속성이 떨어졌다”며 “정부 차원 컨트롤타워를 구축해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팹리스 뿐만 아니라 반도체 설계를 구체화하는 디자인 하우스, 패키징과 테스트를 담당하는 후공정업체(OSAT) 등 생태계 전반을 육성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설계 분야 어려움이 조명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장 가능성이 다분한 분야를 찾아서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고 전했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