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초 세계 1위 해운항만기업 머스크는 이사회 신임 의장으로 SAP CEO 출신을 영입했다. 130여개국에 진출해 직원 수 10만명, 한 해 매출액 40조원이 넘는 세계 최대 해운기업과 글로벌 IT기업의 만남은 물류IT 융합시대가 왔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로 주목 받았다.
이후 머스크는 4차 산업혁명 대응 디지털본부를 설립했고 IBM과 블록체인 연구 합작법인을 설립, 해운빅데이터 스타트업 발굴 연계에 나서고 있다. 빅데이터 분석으로 선박 운항 효율을 7~8% 높이고 운영 위험은 최소화하는 연구도 추진하고 있다.
해운, 선박관리, 항만운영 등 해양산업 전반에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인공지능(AI) 기술을 접목한 해양IoT산업이 급부상하고 있다.
해양IoT는 선박과 항만, 연안과 원양에서 수집한 각종 정보를 빅데이터 기술로 분석해 화물 수송과 선박관리, 항만 운영 등을 최적화하는 물류IT 융합기술이자 서비스다.
선박에 IoT 센서와 장비를 탑재해 선박 상태를 실시간 모니터링하는 소프트웨어(SW)에서 기상 정보, 화물 정보를 분석해 에너지 소비를 줄여주는 에너지절감시스템, 화물 정보를 토대로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찾아주는 화물이송최적화솔루션 등 다양하다.
◇물류시장 SW 경쟁력이 좌우
해양IoT산업이 급부상한 배경에는 4차 산업혁명 기술의 빠른 보급과 함께 물류시장 패권 경쟁이 깔려 있다.
IoT, 빅데이터, AI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은 전 산업 분야에서 기존 기술·서비스 통합과 새로운 서비스를 발굴·제공하는 플랫폼 경쟁시대를 촉발했다. 플랫폼 경쟁력은 더 많은 데이터 확보와 새로운 응용 서비스 제공에 달렸다.
해운, 선박관리, 항만운영 등 해양산업은 상대적으로 정보통신기술(ICT) 접목이 더디다. 인력을 투입해 일일이 수작업으로 해온 업무, 종이 문서를 사용한 아날로그식 관리 운영 행태를 벗어나 자동 SW나 시스템을 선박에 적용, 정보를 취합하고 운항을 최적화한 지도 얼마 안 된다.
4차 산업혁명 기술은 해양산업에도 혁신적 변화를 요구했다.
이제는 화물량보다 화물 정보, 데이터 기반 SW와 이를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이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떠올랐다.
IoT 기술로 개별 선박을 넘어 선단 전체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빅데이터로 분석해 육상과 실시간 공유하며 선박 안전과 운항비용을 최적화하는 해양IoT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자리 잡고 있다.
'물류가 시장을 지배한다'는 말은 어느새 '물류기술이 세상을 바꾼다'로 바뀌어 회자되고 있다.
머스크가 SAP, IBM, 구글 등 글로벌 IT기업과 협력해 지배적인 해운서비스 플랫폼을 구축하고 자사 보유 대형 선단을 기반으로 각종 데이터 확보에 열을 올리는 이유다.
국제해사기구(IMO) e내비게이션 체제 구축도 해양IoT 확산을 견인하는 주요 요인이다.
e내비게이션은 대양을 운항하는 선박의 안전과 해양 환경오염 방지를 위한 선박 운항 기준이다. 이를 지키려면 각종 안전 장비와 SW를 탑재해야 하고, 오염 방지를 위해 에너지 사용을 최적화해야 한다. IoT 솔루션으로 최적 항로를 찾고 진단SW를 도입해 선박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유지해야 한다.
다품종 소량 수송 추세에 맞춰 단거리 급송 수요 증가, 선원직종 회피로 인한 인력확보 어려움 등도 해양IoT 확산 요인이다. 해운기업 지출비용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인건비이고 그 다음은 연료비다.
◇국내 해양IT 수요 공급 회복세
우리나라 대표 항만물류SW기업 토탈소프트뱅크는 지난해 머스크와 클라우드 기반 선박화물운영시스템(CSAP) 구축 계약을 체결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국산 항만물류SW 경쟁력을 보여준 사례다. CSAP는 항만과 선박의 공간, 하역 순서를 고려해 화물을 선박에 최적으로 실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토탈소프트뱅크와 경쟁에서 패한 항만물류SW 세계 1위 N사는 이후 토탈소프트뱅크에 M&A를 제안하기도 했다.
지마린서비스는 자사 관리 현대글로비스 선박에 '선박엔진고장예측시스템(e-CBM)'을 도입, 엔진 고장이나 긴급 정비로 인한 운항지연 문제를 해결했다. e-CBM은 엔진에서 추출한 정보를 빅데이터 기술로 분석해 현 상태를 진단하고 고장을 비롯한 향후 변수를 예측할 수 있다.
마린소프트는 선박 내 각종 장비와 시설을 데이터 통신과 스마트폰으로 점검해 부실 점검을 막고 점검 효율도 높일 수 있는 '디지털 선박 안전경영 시스템'을 출시했다.
랩오투원은 IoT 데이터 기반 선박운항관리 의사결정지원시스템, 이마린은 선박 유지·보수를 최적화할 수 있는 '스마트 원격제어시스템(RMS)'을 개발하고 있다.
현대상선은 '스마트해운(Smart Shipping) 구현'을 중장기 비전으로 제시하고 해운서비스 전반에 IoT와 빅데이터,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하기 시작했다. 냉동컨테이너 이송 관리에 IoT를 도입, 컨테이너 상태를 실시간 체크하고 필요에 따라 육상에서 제어한다.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해 이송 정보를 빠르게 공유하고 보안성을 높였다.
이재인 마린소프트 대표는 “한진해운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 침체였던 국내 해운시장이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면서 선사의 IT솔루션 도입에 관심이 높아지고, 이로 인한 SW개발 문의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산·학·연 협력으로 해양IoT산업 경쟁력을 높이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한국선박전자산업진흥협회를 중심으로 소속 기업, 대학 연구소, 대형 조선사, 해운사 등이 참여한 가운데 스마트자율운항선박포럼을 결성, IMO 자율운항선박 정책에 대응해 국내외 동향을 분석하고, 국제 표준화에 따른 국내 표준화를 추진하고 있다. 산·학·연 협력으로 자율운항선박 기술과 항해 표준 개발을 지원, 관련 시장 선점에 기여한다는 목표다.
내달에는 물류, 해운, 제조 기업과 공공기관, 연구소 등 20여개 산·학·연이 참여한 '자발적 협의체 글로벌 해운물류 디지털 컨소시엄(GSDC)'이 출범할 예정이다.
◇ 유럽·일본에 뒤져…틈새 신시장 공략 필요
중소 해양IT기업의 신제품 개발과 해운기업, 선박관리기업의 IT솔루션 도입이 늘고 있지만 유럽이나 일본 등 해운 강국에 비해서는 뒤처진 상태다.
유럽은 머스크를 중심으로 데이터 기반 해운종합 플랫폼을 구축해 글로벌 해운시장을 지배하려 한다. 화물운송이라는 기존 해운업 틀을 넘어 중장기 신산업으로 해운데이터서비스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친환경 자율운항 선박에 관심이 높아 에너지와 환경오염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자율운항 전기선박을 건조해 시범 운항에도 성공했다.
일본은 선사와 조선소간 협력으로 차세대 선박관리시스템을 개발,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다.
해상에서 선박 운항정보, 기기 상태 등 각종 데이터를 취합하고, 이를 빅데이터 및 AI로 분석해 해난사고 예방, 효율적인 해상수송에 활용한다.
중국은 해운업과 인터넷망을 결합한 해운IT융합 산업 육성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이미 해운 온라인 플랫폼은 200개를 넘었고, 해운IT전문기업도 300개 이상이다.
이에 대응해 우리나라는 정부 차원에서 한국형 e내비게이션 개발, 항만 고도화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유영호 해양대 조선해양IT융합연구소장은 “해양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중장기 비전과 전략 수립에 4차 산업혁명 주요 기술 확보와 융합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면서 “정부 지원 해양IoT R&D를 확대하고 해양IT 전문 인력을 양성해 우리가 주도할 수 있는 해양IoT 시스템과 SW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임동식기자 dsl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