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어머니, 당신 유전자를 믿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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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랑이다. 고등학생 때 가장 못 본 시험 성적이 전교 4등이었다. 행실이 바르다고는 못하지만 어쨌든 학적부는 모범생이다. 부모가 정한 점수를 넘어서면 얼마간 게임을 맘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악착같이 벼락치기 공부를 했다.

학창 시절에 가장 좋아한 게임은 '대항해시대' 시리즈였다. 오대양을 무대로 교역하고, 전투하고, 탐험했다. 항상 사회과부도를 옆에 끼고 메모를 해 가면서 플레이했다. 그 덕분에 수능 선택 과목인 세계지리·세계사에 시간을 따로 할애하지 않아도 1등급 받는 데 무리가 없었다.

영어는 미국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컴퓨터게임 '스타크래프트'가 선생이었다. 탱크톱과 미니스커트를 입은 스피어스와 대화해 보겠다며 수업시간에 자지 않기 시작했다. 동시에 스타크래프트 캠페인을 반복 플레이하면서 자연스레 주요 구문을 암기하고 응용할 수 있게 됐다. 토익 점수 취득과 외국계 회사 영어 면접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좋은 일만 있은 건 아니다. 사양 높은 게임을 하기 위해 서울 용산전자상가에서 부품을 구하느라 발품을 팔고 있다가 형들에게 걸려 싸우다가 돈과 부품을 뺏기고 크게 다치기도 했다. 대학 때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일리단 서버 퍼스트킬을 달성하기 위해 강의도 많이 빼먹었다. 3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할 때까지 게임만 했다. 함께 공격대에 있던 형은 사법고시 2차 시험일에 레이드를 뛰다가 지각할 뻔 했다고 한다.

내 인생에서 게임 관련 행동이 영향력을 행사한 지 12개월 이상 됐다. 아니 24년 이상 지속됐으니 세계보건기구(WHO) 기준에 따르면 나는 게임이용장애인이다.

그러나 난 적당히 잘살고 있다. 연애 공백이 좀 긴 게 걸린다. 만약 어렸을 때 나를 게임장애로 병원에 데려갔다면 난 지금 사회의 일원으로서 맡은 역할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정상이 아니었다는 자기혐오에 빠져 자발적으로 사회를 배척하고 방에 처박혀서 게임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게임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증명하는 교보재로 쓰였을지도 모른다.

학부모 단체는 게임장애 국내 도입에 적극적이다. 게임산업계와 정신의학계가 내놓는 근거는 필요치 않다. 오직 중요한 건 자녀 학습이다. 학습시간을 빼앗는 게임을 증오한다.

이들은 자녀가 왜 게임을 하는지 이해할 생각도 계획도 없다. “다 너를 위한 일이란다. 사랑한다”는 말을 기계적으로 내뱉는다. 게임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 보지도 않는다. 오직 공부를 못하면 인생이 실패하는 것처럼 겁을 주고, 그 원인이 게임에 있다고 호도한다.

그러나 이 시대 학부모가 공부를 못했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은 아니지 않은가. 책임을 게임에 전가하고 자녀 학습에 신경을 쓴다고 해도 어차피 당신들 자녀다. 당신의 유전자를 믿지 마라. 게임을 빼앗으면 곧 다른 거리를 찾게 될 테니. 당신이 자랄 때처럼….


이현수기자 hsool@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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