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암을 조기에 찾아내는 진단보조 인공지능(AI)이 있다고 하자. 알고리즘 자체는 이미 완성됐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병원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는 수준까지 검증하려면 수많은 환자의 위·대장 병리 데이터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런 데이터가 세상에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 안에 이미 쌓여 있는데도 제때 접근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 데이터는 여러 병원에 뿔뿔이 흩어져 있고, 병원마다 따로 계약을 맺고 심의를 거쳐야 한다. 데이터를 구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리다 보니 좋은 알고리즘을 갖고도 검증 단계에서 멈춰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의료AI의 발전이 쉽지 않은 이유다.
신약이나 첨단기기 업계에서는 이렇게 좋은 기술이 상용화 문턱을 넘지 못하고 사라지는 구간을 '죽음의 계곡'이라 부른다. 개발부터 인허가, 병원 현장 도입, 건강보험 수가 인정까지 단계마다 필요한 자금과 정보가 부족해 중간에 멈춰서는 것이다. 결국 데이터는 이 계곡을 건너게 해 주는 다리인 셈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이 다리를 놓는 작업이 한창이다. 미국에서는 메이요클리닉의 심전도 연구를 바탕으로 조인트벤처 앤퓨마나가 심장 박출률 저하 위험을 예측하는 AI 솔루션을 개발해 데이터·임상·평가·검증을 거쳐 미국식품의약국(FDA) 510(k) 인증까지 받아냈다.
유럽연합(EU)은 'SHAIPED 프로젝트'를 통해 11개 회원국의 보건데이터접근기구(HDAB)와 30여개 기관을 연결해 AI 의료기기의 인허가 경로를 표준화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국가 차원에서 데이터를 하나의 파이프라인으로 관리하며 '허가받은 AI'가 병상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앞당기려는 시도다.
유럽 개별 국가들의 움직임도 비슷하다. 핀란드는 2020년부터 사회·건강 데이터 허가를 한 창구에서 처리하는 '핀데이터'(Findata)를 운영해 일차진료 기록부터 청구 데이터까지 단일 절차로 연구자에게 내주고 있다. 프랑스는 '헬스데이터허브'(Health Data Hub)로 건강보험 환급·병원 퇴원·사망원인 데이터를 아우르는 국가건강데이터시스템(SNDS)을 연구용으로 개방한다.
두 기관 모두 데이터를 직접 소유하기보다 여러 기관에 흩어진 데이터를 찾고, 신청하고, 안전하게 쓰도록 잇는 '중개자' 역할에 집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결국 관건은 데이터를 얼마나 많이 모으느냐가 아니라, 흩어진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고 안전하게 연결해 실제 연구와 제품 개발로 이어주느냐에 있다는 뜻이다.
한국도 비슷한 다리를 놓아왔다. 한국보건의료정보원이 운영하는 '의료데이터 중심병원' 사업은 2020년 5개 컨소시엄으로 시작해 현재 7개 컨소시엄, 45개 의료기관(상급종합병원 32곳, 종합병원 11곳, 전문병원 2곳)이 참여하는 전국망으로 커졌다.

1기(2020~2022년)에는 병원별 최고정보책임자(CIO) 중심의 데이터 거버넌스와 활용 인프라를 다졌고, 2기(2023~2025년)에는 K-CURE 플랫폼과 안심활용센터를 열어 데이터 공동 활용 사례를 쌓았다. 폐쇄형·원격형 분석 환경을 갖춘 안심활용센터를 전국적으로 9개 운영하고 있다.
올해 시작한 3기(2026~2028년)의 목표는 '데이터AX 적용기반 구축'이다. 데이터를 모으고 지키는 단계를 넘어, AI가 실제로 진료 현장에 스며들도록 만드는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암 데이터는 그중에서도 앞서가는 영역이다. K-CURE 네트워크는 15개 암센터급 병원이 참여해 위암·유방암·간암·대장암·폐암·췌장암, 신장암·전립선암까지 더해 8개 암종, 약 61만명 규모의 임상 라이브러리를 구축했다.
여기에 건강보험·검진·사망 정보를 결합한 암 공공 라이브러리를 더해 연구자는 하나의 창구에서 임상데이터와 공공데이터를 함께 활용할 수 있다. 이런 결합 데이터를 활용해 국제학술지에 실린 대장암 사망 위험 예측 AI 연구 등 성과도 이어지고 있다.
국립대병원 500만명 규모 진료 데이터를 보건의료빅데이터 플랫폼과 잇는 '브릿지 프로그램'도 올 하반기부터 가동해 흩어진 데이터를 하나의 흐름으로 모으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암 환자의 유전체·단백체 등 다중오믹스 정보를 대규모로 구축 중인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 사업과의 연계 방안도 마련되고 있다. 임상데이터에 유전체 정보까지 결합하면 개인별 맞춤 치료를 예측하는 정밀의료 수준의 AI 개발이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이 연계는 의료 데이터 활용의 다음 단계로 꼽힌다.
데이터 인프라만으로는 '죽음의 계곡'을 건널 수 없다. 그래서 한국보건의료정보원은 AI 기업의 성장 단계에 맞춘 두 가지 지원 사업을 병행한다. 인허가 전 개발 단계를 지원하는'의료AI 데이터 활용 바우처 지원사업'은 지난해 추경 예산으로 8개 기업에 24억원을 지원했다. 짧은 공고 기간에도 56개 업체가 몰릴 만큼 산업계 수요가 뜨거웠다.

올해는 지원 규모를 40개 과제로 확대해 데이터 활용, AI 연구, 사업화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본격 추진하고 있다. 인허가 이후 병원 현장 진입과 수가 반영을 돕는 '의료AI 테스트베드 지원사업'은 올해 임상 적용형(트랙1) 12개, 워크플로우 효율화형(트랙2) 10개 등 총 22개 과제를 의료데이터 중심병원 참여 의료기관과 매칭한다. 실제 진료 환경에서 검증받은 제품은 그만큼 신뢰도를 얻고, 병원은 의료AI 도입 경험을 쌓는 상호 이익 구조다.
지난해 바우처 지원을 받은 8개 기업은 의료데이터 중심병원의 데이터를 활용해 각자의 AI 솔루션을 검증·고도화하는 단계를 밟고 있다. 이런 매칭을 체계화하기 위해 한국보건의료정보원은 메타데이터 기반 보건의료데이터 중개포털 '헬스데이터랜드스케이프' 구축도 병행하고 있다. 어떤 병원이 어떤 질환의 어떤 데이터를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한눈에 검색할 수 있게 되면 기업과 연구자가 데이터를 찾아 헤매는 시간부터 줄어드는 셈이다.
디지털의료기기 허가 건수는 2025년 7월 기준 누적 388건까지 늘었고 그 이후로도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산업계 성장 속도를 데이터 인프라와 제도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목소리도 여전하다. 병원마다 다른 절차로 이뤄지는 임상시험심사위원회(IRB)와 데이터심의위원회(DRB) 심의는 여러 기관 데이터를 결합해야 하는 다기관 연구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다.
한국보건의료정보원은 통합 심의 체계와 공용 데이터심의위원회 협력 모델을 정비하고 원스톱 데이터 컨설팅으로 의료진 컨설팅부터 실증 평가까지 한 곳에서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안전한 활용과 산업적 활용 사이의 균형을 법으로 뒷받침할 디지털헬스케어법 제정도 남은 과제로 꼽힌다.
의료 AI가 병상에 서기까지 남은 마지막 계곡은 결국 '신뢰의 계곡'이다.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도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받지 못하면 서랍 속 기술로 남는다.
이 신뢰의 계곡을 건너는 다리는 병원이나 기업 어느 한쪽의 힘만으로는 놓을 수 없다. 데이터를 쥔 병원과 알고리즘을 쥔 기업 사이에서 표준을 만들고, 규칙을 정비하고, 실증의 장을 열어주는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의료데이터 중심병원·K-CURE·안심활용센터로 이어지는 데이터 인프라, 바우처와 테스트베드로 이어지는 실증 지원, 그리고 심의 체계와 법제 정비까지 한국보건의료정보원이 이 모든 지점에 관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병원과 기업, 정부 사이에서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한국보건의료정보원이 맡고 있는 셈이다.
위암을 조기에 찾아내는 그 AI가 더 이상 데이터를 찾아 헤매지 않고 곧장 검증대에 오를 수 있는 날, 그날이 의료AI가 마지막 계곡을 건너는 순간이 될 것이다. 한국보건의료정보원은 그 다리를 더 넓고 튼튼하게 놓아, 병원 안에 잠든 데이터가 국민 건강 증진과 산업 경쟁력 강화에 기여하는 자산으로 이어지도록 계속 힘을 쏟을 것이다.
염민섭 한국보건의료정보원장

〈필자〉39회 행정고시를 거쳐 공직에 입문했다. 보건복지부에서 정신건강정책관, 장애인정책국장, 노인정책관 등 주요 보직을 거쳤다. 2024년 7월 한국보건의료정보원장으로 임명됐으며 보건의료 분야 전문성을 바탕으로 데이터 표준화와 안전한 활용 기반으로 의료 서비스 질 향상과 국민 건강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