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땅속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물리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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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나 영화 속 물리학자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자. 기상천외한 원리를 이용해 파괴력 강한 무기를 만들거나 세상을 위협하는 존재에 대항할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모습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필자가 종사하는 핵입자 물리학 분야 역시 미디어의 묘사 덕분인지 대중은 일단 핵무기 개발부터 물어 본다. 지하 700m 땅속에서 핵입자 실험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우리 연구는 영화에서처럼 세상을 위협하거나 지켜 주는 그런 연구가 아니다. 먼 미래에는 그런 일에 활용될 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지하실험 연구단은 말 그대로 지하에서 주된 실험을 수행하는 조직이다. 암흑물질 탐색과 중성미자 특성을 연구하고 있다. 암흑물질은 우주의 약 4분의 1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질량이 있다는 사실 이외 밝혀진 것이 전혀 없다. 이름이 암흑물질인 이유다. 우리 연구단에서는 다양한 후보 가운데에서도 약하게 상호 작용하는 무거운 입자 윔프(WIMP)에 관심이 있다. 중성미자 특성에 관한 연구에서는 중성미자 미방출 이중 베타 붕괴 현상에 집중하고 있다. 중성미자 스스로가 반입자일 수 있다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이 현상은 이론상의 반감기가 매우 길지만 관측에 성공한다면 그 가정은 증명이 될 것이다. 중성미자 질량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있다.

왜 지하실험 시설이 필요한 걸까. 두 실험의 공통점 때문이다. 매우 희귀하게 발생하는 핵입자 반응을 관측한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지하세계가 필요하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방사선이 지금도 곳곳에서 방출되고 있다. 이러한 방사선은 인체에 무해하지만 희귀 핵입자의 반응 현상 관측에는 치명타로 작용한다. 우주에서도 방사선이 지구로 쏟아지고 있다. 특히 대기권과 반응해 발생되는 뮤온 입자는 두 실험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거하기 어려운 심각한 배경 잡음으로 작용한다. 뮤온 입자를 줄이려면 엄청난 두께의 차폐체로 둘러싸인 실험 환경이 요구된다. 이에 필요한 실험 설비를 지하에 구축하면 다소 적은 비용으로 차폐 효과를 볼 수 있다. 가성비를 따졌을 때 지하로 내려가면 지상의 실험실보다 훨씬 이득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땅을 판다는 건 비효율이기 때문에 물리학계는 이미 만들어진 지하 시설을 최우선 고려한다. 현재 지하 700m의 양양 양수발전소 내부에 위치하고 있는 공간이 실험실로 선택된 배경이다. 양수발전소 내부 실험실에선 암흑물질 탐색을 위한 'COSINE' 실험이 한창이고, 중성미자 특성 연구를 위한 'AMoRE' 실험도 진행되고 있다. 연구단에선 좀 더 경쟁력 있는 연구를 위해 정선 한덕철광을 활용한 지하 1000m 깊이의 우주입자 연구시설을 계획하고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가까운 일본과 중국, 그리고 이탈리아 및 미국까지도 점점 더 깊은 곳에서 시설을 구축하려는 경쟁이 가속되고 있다.

희귀 핵입자 반응 현상 연구는 현실만을 따져봤을 때 마냥 매력 만점이라 말하기엔 어려운 분야다. 워낙 적은 신호를 포착해야 하기 때문에 주변의 배경 잡음을 최소한으로 낮춰야 하고, 수많은 부품을 조립하고 개발하기 위한 최적 조건을 찾아야 하며, 검출기를 만들어야 한다. 신호를 수년 동안 수집하고 분석하는 과정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연구를 한다. 현대 물리학의 최대 과제로 언급되고, 노벨물리학상 0순위 후보의 연구 주제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순수한 호기심이 인류의 지식 확장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연구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오늘도 많은 물리학자가 새로운 발견을 기대하면서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고 있다.

소중호 기초과학연구원(IBS) 지하실험연구단 선임기술원 jhso5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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