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 칼럼]386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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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386 삶은 불안했다. 오죽하면 지금도 백골단에 잡혀가는 꿈을 꿀까. 대학 정문과 후문 길에는 늘 터진 최루탄, 사과탄 파편과 깨진 보도블록이 난무했다. 학교 진입로에는 곳곳에 화염병으로 그을린 자국이 선명했다.

지하철역, 교문 앞 전경이 검문을 했다.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면 끝이었다. 가방을 뒤졌고, 신분증을 검사했다. 교재 겉 표면에 쓰인 저자 이름이 '막스베버'라고 닭장차에 태우던 시절이었다. 그들에게는 막스베버가 '칼막스'가 아니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총검술을 배웠다. 알파벳 무늬로 알록달록한 교련복을 입고 학교 운동장에서 총검술을 배웠다. 일 년에 한번 성남 문무대와 전방에 입소해 사격과 유격, 공수훈련까지 배웠다. 학교에서는 독재와, 교련시간엔 북괴와 싸웠다. 몇몇은 경찰과 안기부로 끌려갔다. 시위 나가던 선배를 붙잡고, 정문에서 통곡하던 어머니를 흔하게 보던 시절이었다.

상아탑은 우골탑(牛骨塔)이었다. '학식'을 먹으며 민주화를, 사회주의를, 분단조국을 떠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된 노동으로 얻은 돈을 대학생 자식에게 말없이 내줬다. 민주화를, 조국통일을, 노동해방을 외쳐도 결국 공장임금노동자, 도시빈민, 소작농 아버지와 콩나물 한푼을 아낀 어머니 경제력에 의존하는 '빈대' 인생이었다.

할아버지는 논 다섯 마지기와 산비탈 밭 일곱 마지기 남짓한 소작농이었다. 아버지는 산업화가 되면서 고향을 떠나 배를 타던 단순 임금노동자였다. '아끼꼬'라는 이름을 가진 첫째 고모와 107세로 몇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는 천원과 오천 원 만 원짜리를 그림을 보고 구분하는 까막눈이었다. 어린 고모는 서울 부잣집 식모로 가 '군입'을 줄였다. 이모들은 동대문 필동 근처 가발공장이나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미싱을 돌렸다. 막내 삼촌은 중소도시 철공소에서 용접을 배웠다. 기술만이 희망이었다.

요즘에서야 알았다. 386은 민족전쟁, 4·19, 5·16이란 격변기를 거치지 않은 편안한 세대였다는 것을. 그 이야기를 '꼰대'를 통해 전해 들었던 전후 가장 행복한 세대였다는 것을.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 고모와 이모, 삼촌이 한두 푼 보태 서울로 등록금을 보냈다는 것을.

386은 이기적이었다. 전후 베이비부머 시대를 지나 경쟁이 덜한 시기에 대학에 들어갔고, 산업성장기여서 취업이 쉬웠다. 산업현장에 들어가 일을 하던 같은 또래 희생을 볼모로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욕했다. 삼촌과 아버지는 기득권세대였고, 대항하는 것은 언제나 정당했다.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동생과 이모, 고모의 희생에 의해 태어난 대한민국 최초 엘리트 권력이었다.

386은 요즘 욕 좀 먹는다. '권력화됐다' '뻔뻔하다' '기득권에 안주한다'는 20, 30대 질책은 아프다. 독재와 독점에 화염병을 던지던 이 세대는 권력과 경제를 독점하고, 새로운 산업과 서비스 육성에 등한시하는 '악질 꼰대'가 됐다. 일상적인 편 가르기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세대에 대한 남 탓은 지겹다.

386은 더 이상 남을 비판하는 세대가 아니다. 대한민국과 경제, 기업을 움직이는 실제 권력이다. 기획하고 실행해야 한다. 욕하기보다 비판 받는 것에 익숙해야 한다.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 없는 자를,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비판하면 그건 오만한 갑질이다.

올해 386 첫 번째 주자였던 1960년생은 우리 나이로 예순이다. 80년대 고통스러운 기억도 벌써 40년 전 이야기다. 386 감성과 기억은 그 정도면 됐다.


주필 김상용 srkim@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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