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기업에 '털 한 오라기'도 강요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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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위해 정강이 털 하나도 뽑아 줄 수 없다. 털 한 오라기를 뽑아 주면 국가는 다리를 달라고 한다. 그다음에는 머리를 달라 할 것이다. 처음부터 안 줘야 한다.”

중국 전국시대 제자백가 가운데 양주라는 사람이 주장한 것이다. 장자의 스승으로 알려진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양주의 사상은 위험하다고 해서 모두 없앴기 때문이다. 제자백가 가운데 가장 많은 욕을 얻어먹은 이단아이기도 하다. 맹자도 한비자도 양주를 비판했다.

양주의 철학은 이기주의로 비난받았지만 오늘날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양주는 '사회'와 '나'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한다. 목적은 '나'이고 '사회'는 수단일 뿐이라고.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나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회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고, 사회를 위해 싸우고, 사회를 위해 죽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살신성인'이나 '멸사봉공' 같은 유교 사상이 여전히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양주의 주장은 여전히 도발적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에게 솔직히 자문하면 어떤 답이 나올까. 사회와 나 가운데 어떤 것이 목적이고 어떤 것이 수단이 돼야 하는가.

이익 추구가 목적인 기업에 물으면 대답은 더욱 명확해진다. 공익(公益)을 위해 사익(社益)을 포기하라면 기업은 존재하기 어렵다. 그런데 요즘 부품·장비 업계는 살신성인, 멸사봉공을 강요당하고 있다.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조성 사업은 주객이 전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반도체 초격차 전략으로 기획된 프로젝트는 어느새 국가균형발전론에 막혀 갈 길을 잃었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장비 업계는 핵심 기술 유출 방지라는 대의명분에 수출길이 막힐 지경이다. 공익을 위해 사익을 질식시키는 일이 거리낌 없다.

기업에 살신성인을 강요하면 어떤 결말이 펼쳐질까. 국가균형발전론에 밀려 인재 유치도 어렵고 협력사 구하기도 어려운 곳에 반도체 클러스터가 덩그렇게 조성된다면, 기술 유출 우려로 한국 기업만 수출길이 막힌다면 과연 누가 이득을 볼까. 그리고 이런 결과가 궁극적으로 한국 경제에는 어떤 후과를 가져올까.

시대가 바뀌었다. 설득 논리도 바뀌어야 한다. 살신성인과 같은 전근대적 사상으론 설득도 힘들 뿐만 아니라 자칫 공멸을 자초할 수 있다. 글로벌 경쟁이 첨예한 산업계에서는 더욱 위험하다.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 경쟁에서 이기려면 국가균형발전보다 '클러스터 경쟁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규제 혁파나 인프라 제공과 같은 인센티브 중심으로 경쟁해야 한다. 그러면 반도체 업계도 기분 좋게 장단을 맞출 것이다.

OLED 장비 업계를 대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무조건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장비 업계 생존 문제부터 먼저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면 국내 대기업 간 교차 구매를 활성화해서 내수시장을 넓힌다든지 수출을 오히려 장려하되 보안 대책을 지원하는 방안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지금은 유교 봉건사회나 군부 독재 시절이 아니다. 국가를 위해 개인이나 기업이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다. 기업에 털 한 오라기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사익이 공익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장지영 미래산업부 데스크 jyajang@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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