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기차 시장이 매년 두 배가량 성장하며 글로벌 완성차 업계가 앞다퉈 신차를 내놓을 만큼 '전기차 메카'로 부상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기차 보조금과 '반값 충전요금'(전기요금), 세금·주차·도로 통행료 감면 등 다양한 혜택에다 충전인프라 확대에 유리한 지형 조건도 큰 역할을 했다. 이에 반해 산업적 가치로 따지면 일부 완성차나 배터리 등 특정 산업군만 혜택을 누렸을 뿐, 연관 후방 산업은 전혀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접근법은 다르다. 이미 9년 전부터 민간 기업 주도로 전기차 미래 모빌리티 생태계를 준비해왔다. 전기차의 기존 배터리를 이용한 후방산업이 생겨났고 차량에 저장된 전기로 개인이 금전적 혜택을 누리는 에너지 신시장까지 열리고 있다.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아직 국가 전기사업법에 따라 전기재판매가 허용되지 않는다. 또 재사용(Reuse) 배터리에 대한 국가 차원의 안전 규격도 없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시장 조건을 갖췄다. 현지 취재로 일본 전기차 후방산업 경쟁력을 점검한다.
◇9년 전부터 준비한 전기차 배터리 재사용 산업
올해 초 일본에서 전기차 폐·중고 배터리를 재사용(Reuse)화 시킨 '4R에너지' 공장이 현지 언론에 공개되면서 글로벌 전기차 업계가 이를 주목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독일 등 완성차 업계는 수년전부터 전기차 배터리를 에너지저장장치(ESS) 등으로 재사용하는 자체 실증사업을 벌여왔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사업화에 나선 건 이 회사가 세계 처음이다.
전기차 배터리는 다른 용도로 재사용하는 건 기술적으로 어려운 게 없다. 다만 배터리팩은 수백, 수십개 셀과 모듈로 구성되는데 이미 사용한 배터리 각각의 셀과 모듈은 충·방전 성능 등이 제각각이다. 이 때문에 비슷한 상태 배터리끼리 조합하는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 상품화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셀과 모듈을 해체하고 비슷한 상태의 모듈끼리 선별한 후 다시 팩으로 조립하는데 적지 않은 공정과 시간이 소요된다.
이 때문에 재사용 배터리 생산 비용이 새 배터리 가격보다 고가인 탓에 지금까지 사업화가 되지 못했다. 또 전기차에서 배터리를 빼낸 다음 이를 수거한 후 운반까지 과정도 만만치 않고, 재사용 배터리 수요처 발굴도 쉽지 않다.
하지만 4R에너지는 닛산의 첫 전기차 '리프(Leaf)'가 판매를 시작한 2010년 12월보다 앞서 같은 해 10월에 설립됐다. 이미 9년 전부터 닛산과 스미토모상사가 후방산업을 내다보고 합작사를 출범한 것이다. 이후 다년간의 실증사업과 연구개발(R&D)을 거듭하며 양산 체계를 완성했다.
국산 전기차만해도 보통 배터리모듈이 10개 안팎인데 반해 리프 모듈은 48개로 구성됐다. 이는 닛산이 애초부터 배터리 후방 산업을 고려한 사전 조치다. 수 백개 배터리 셀단위로 검사하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지만, 모듈 단위를 최대한 세분화시킨 후 모듈만 검사한다면 공정단계를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전기차 1대 배터리를 검사하는데 하루 이상 소요되지만, 4R에너지는 이를 4시간 안팎으로 줄이는 독자 체계를 완성했다.
또한 리프는 다른 전기차와 달리 차량의 구조 변경 없이도 배터리팩 탈부착이 쉽도록 애초부터 배터리를 차량 밑바닥에 장착한 점도 이 때문으로 해석된다.
4R에너지는 배터리팩을 회수한 이후 △과방전 등 이력 검사 △케이스 해체 △최대 셀단위까지 검사 가능한 모듈 검사 △모듈 별 상태 분류 △팩·모듈 재조립 △최종 검사 등 과정을 거쳐 재사용 배터리팩을 생산한다.
시오미 다츠로 4R에너지 부사장은 “최초 과방전 이력 등 배터리관리시스템(BMS) 정보를 활용하고 SOC(충·방전량 상태)·SOH(열화정도) 등의 여러 기준을 적용해 약 10개 등급으로 모듈을 분류한다”며 “소프트웨어 분석기술로 배터리 상태를 파악하지만 성능이 좋은 모듈과 그렇지 않은 모듈을 섞어 놓으면 좋아지는 현상도 있다”고 말했다. 이는 오랜 연구개발 끝에 얻은 노하우다. 그는 이어 “1등급 배터리는 리프 전기차로 다시 사용하고, ESS나 무정전전원공급장치(UPS), 골프카트, 지게차, 무인운반차(AGV) 등 다수 수요처도 확보했다”고 말했다.
배터리를 약 10개 등급으로 분류하는 건 다양한 수요처 제품 특성을 고려한 조치로 분석된다.
◇세계 최초 전기차 배터리 교환 프로그램 도입
4R에너지가 전기차 배터리 재사용 생산라인을 구축하면서 일본에는 세계 최초로 전기차 배터리 교환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배터리 재사용이 후방산업 창출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전기차 이용 라이프 사이클까지 바뀌고 있다. 가격 부담을 낮춘 배터리 교환이 가능해지면서 장기적 차량운행이 가능하고 개인 운행 패턴에 따라 최적화된 배터리를 골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6년 BMW가 독일 전기차 고객에 한해 중고 배터리(19㎾h급)를 더 큰 용량의 새 배터리(29㎾h)로 교환해주는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당시 교체 비용은 약 1000만원. 하지만 당시 지속적인 수요처를 발굴하지 못해 배터리 교환 프로그램은 단기간 사업에 그쳤다.
반면 닛산은 4R에너지가 재사용 생산라인을 가동하면서 전기차 배터리 교환 프로그램을 지난 5월에 론칭했다. 이 교환 프로그램은 고객의 전기차 운행 패턴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됐다. 가격도 최소 30만엔부터 82만엔까지 다양하다. 특이한 점은 4R에너지에서 생산된 재사용 배터리(24㎾h)로 교환 받는데 비용이 30만엔(약 300만원)이다. 배터리 업체가 장기간 대규모 발주처인 완성차 업체에 주는 가격(1㎾h 당)이 대략 200만~250만원인 점을 고려하면 저렴하다. 그 밖에 배터리 기술 발달로 에너지밀도가 높아지면서 24㎾h급 배터리가 들어가는 기존 공간에 배터리 용량 30㎾h·40㎾h급 새 배터리 교환도 가능하다. 이들 각각 교체 비용은 80만엔, 82만엔이다. 지난 5개월 간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 전기차 배터리를 교환한 고객은 수백명 수준으로 알려졌다.
시오미 다츠로 부사장은 “아직 배터리 수거·운반에 어려움은 있지만, 제로 에미션(Zero Emissio)를 목표로 보다 안정적이고 저렴한 배터리를 공급하는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요코하마(일본)=
박태준 자동차 전문기자 gaiu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