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非) 바이오 기업의 바이오·헬스 시장 러시가 이어진다. 제조, IT서비스 등 기존 주력사업 성장이 정체되면서 새 먹거리로 바이오산업을 점찍었다. 과거 계열사 설립, 대형 인수합병(M&A) 등을 수반한 시장 진출보다는 특정 시장과 기업을 겨냥한 '선택과 집중' 모델이 주류를 이룬다. 우리나라 바이오·헬스 기업 역량 또한 연구개발(R&D) 단계를 넘어 상업화 단계에 진입하면서 가능성 있는 기업을 사들이는 M&A도 활발해진다. 자금력을 보유한 비 바이오기업의 바이오 진출은 내부적으로 새로운 생존 모델을 발굴하는 한편 우리나라 바이오산업 경쟁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기회로 부상한다.
◇태양광부터 IT까지…바이오 시장 진출 줄이어
작년부터 다양한 산업군에서 바이오·헬스 시장 진출이 이어졌다. IT분야에서는 바이오·헬스 연구, 서비스 개발을 지원하는 도구로 사업 기회를 모색했다. 제조업 등 연결고리가 전혀 없는 영역은 신약, 의료기기 등 순수 바이오 분야 중에서도 적은 비용으로 안정적 수익을 확보할 사업 모델을 구상한다.
IT업계에서는 네이버, 카카오, 엔디에스(NDS)가 대표적이다. 네이버 계열사인 네이버비즈니스플랫폼(NBP)은 의료 클라우드 시장 공략에 집중한다. 진단, 예방, 치료 등 의료 전 과정에서 방대한 데이터가 쏟아지면서 클라우드 검토 수요가 늘어난다. 작년부터 국가전략프로젝트인 '정밀의료병원정보시스템(P-HIS) 구축사업'에 클라우드 사업자로 선정됐다.
카카오는 카카오인베스트먼트를 통해 서울아산병원, 현대중공업지주와 아산카카오메디컬데이터를 설립했다. 세 곳이 100억원을 출자해 설립한 기업은 의료 데이터를 구조화하고, 빅데이터 플랫폼 사업을 목적으로 한다. 500만명 환자 정보를 보유한 국내 최대 병원과 통신, 콘텐츠 플랫폼 기업이 만나 데이터 사업을 펼치는 첫 사례다. 엔디에스 역시 국내 IT 서비스 기업으로는 최초로 지난달 체외진단 등 바이오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태양광 발전 설비 기업인 OCI는 제조업 한계를 딛고 바이오산업에서 성공신화를 준비한다. 7월 바이오사업본부를 만든데 이어 연말까지 3~4개 바이오 기업을 M&A할 계획이다. 여러 바이오 분야 중에서도 항암제 개발에 특화해 집중 육성한다. 포스코 역시 올 초 바이오 신사업 개발, 전략 수립 등 바이오 전문가를 대거 채용했다. 3월에는 권오준 전 포스코 회장이 직접 바이오 사업 구상을 밝히는 등 신사업으로 공을 들인다. 포스텍의 R&D 결과물을 포스코가 사업화로 이끄는 모델이 유력하다.
◇대형M&A 지양, 역량 있는 바이오텍 확보 경쟁
바이오 사업은 크게 △M&A △창업 △투자 등 세 모델로 나뉜다.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이 바이오사업을 추진할 경우 대형 M&A로 시장과 기술을 확보한다. 사업모델이 확실할 경우 창업을 하거나 가능성 있는 기업에 투자를 하는 것도 방법이다.
기존 바이오시장 진출은 삼성, LG, SK 등 대기업 주도로 수 조원에 달하는 자금을 투입해 기술을 개발하거나 대형 M&A를 선호했다. 삼성바이오에피스, 삼성메디슨, LG화학, SK바이오텍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 바이오 시장 진출을 선언한 기업은 충분한 자금력을 보유하지만 리스크를 최소화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대형 M&A나 내부 기술 개발보다는 가능성 있는 초기 바이오 기업에 투자한다.
OCI와 엔디에스 등 바이오 기반이 전무한 기업 모두 초기 바이오 기업 투자로 시장에 첫 발을 디뎠다. 10개 후보물질 중 하나만 성공해도 '잭팟'을 터뜨리는 바이오산업 특성을 고려, 기술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전사차원에서 재무, 경영, 마케팅 등을 지원하는데 집중한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과거에는 한 기업이 모든 것을 다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자금력이 있으면 기술까지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줄었다”면서 “진단, 치료 등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확보하는 M&A를 추진하고, 이들의 역량을 키우는 데 집중하는 경향”이라고 말했다.
초기 바이오기업 투자는 현 바이오산업에서 투자대비 효율을 극대화하는 모델이다. 과거 대형 M&A 혹은 자체 기술 개발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국내 바이오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가능성 있는 기업을 인수하고 싶지만, 대부분 기술 초기단계에 불과해 해외 기업을 사들이거나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자체 개발 밖에 방법이 없었다.
현재 우리나라 바이오텍 역량은 세계 수준에 도달했다. 대형 제약사, 바이오기업에 근무하면서 축적한 노하우를 창업으로 연결했다. 2016년 기준 사상 최대인 400개가 넘는 바이오 벤처가 창업했다. 올 상반기에도 바이오 벤처 투자는 전 산업에서 최대치(4139억원)를 기록했다. 인재와 자금이 바이오시장에 집중되면서 잠재력 있는 스타트업을 선택할 폭도 넓어졌다.
신정섭 KB인베스트먼트 본부장은 “2000년대 바이오 벤처 붐 당시 많은 유망 기업이 투자를 받았는데, 대다수 기업이 이제야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면서 “현재 바이오 벤처는 상당수 시행착오를 경험하고, 기술력을 높인 상태여서 성과를 내는 데 절반 이상 시간을 단축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 진출 러시…산업 경쟁력 높이는 절호 기회
바이오산업의 가장 큰 매력은 '가능성'에 있다. 10년 이상의 연구기간과 수조원에 달하는 투자가 이어져도 성공 가능성은 1% 정도다. 하지만 블록버스터급 신약 개발에 성공할 경우 연간 수조원 매출은 어렵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제조, IT 등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기술 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 특허와 기술 장벽으로 신약 하나가 개발되면 십 수년간 안정적인 매출을 거둔다.
확실한 수요처가 있다는 것 역시 바이오산업 매력 중 하나다. 환자는 세계 어디에나 있으며 고령화 등으로 의약품, 의료기기 수요는 갈수록 늘어난다. 우리나라 주력 산업인 자동차와 반도체를 합쳐도 세계 시장은 약 1000조원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계 의약품 시장만 1200조원이 넘는다. 제조, IT, 콘텐츠 등 접점이 없는 기업도 바이오산업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바이오 업계는 연이은 비(非) 바이오업체 시장 진출에 기대를 건다.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기업이 바이오 시장에 들어오면서 M&A 활성화는 물론 초기 바이오기업 성장을 도울 것이라는 기대다.
이 부회장은 “국내 바이오텍 기술력이 연구실이 아니라 시장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자금과 경영, 마케팅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지원이 필요하다”면서 “자금력 있는 비 바이오업체가 바이오 시장에 진출하면 이들에 대한 투자로 기업 경쟁력은 물론 세계시장 진출, 국가 산업 경쟁력 향상 등 다양한 기대효과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지속 가능한 투자 여부가 관건이다. 폭 넓은 바이오 분야 중에서도 성공 가능성이 높은 분야를 전략적으로 투자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실제 한미약품, 유한양행, 녹십자 등 제약사도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 일환으로 많은 바이오 기업에 투자한다. 대부분 R&D 단계인 것임을 감안할 때 성공사례는 없다.
전문가들은 기존 바이오시장에 오픈 이노베이션은 단순 지분 투자 개념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자사가 보유한 포트폴리오와 장기 비전을 고려해 시너지가 예상되는 곳에 집중 투자가 요구된다. 물리적, 화학적 결합이 가능하도록 지원도 필요하다.
신 본부장은 “국내 제약사가 바이오 벤처를 끌어안지 못하는 상황에서 타 산업 대기업이 시장에 바이오 시장에 진출해 밸류체인을 형성한다면 긍정적”이라면서 “과거 IT기업은 주가부양 차원에서 바이오기업에 투자했는데, 이런 행위를 지양하고 의사결정권자가 긴 호흡으로 지속 가능한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전자신문 CIOBIZ] 정용철 의료/바이오 전문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