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2003년 삼성반도체 온양 패키지 사업장에서 일한 이모 씨는 2010년 뇌종양 진단을 받고 2012년 5월 사망했다. 이씨는 고용노동부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인정해 달라고 했지만 공단은 역학 조사 결과 근거가 없다며 산재 인정을 거절했다. 이씨는 2011년 4월 이 같은 공단 결정에 불복, 소송을 냈다. 1심은 이씨 산재를 인정했다. 2심 재판부는 업무와 뇌종양 발병 사이에 인과 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1심 결정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1심과 같이 산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리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공단은 소송을 취하했고, 이씨는 결국 뇌종양 산재를 인정받았다.
8쪽 분량의 이씨 소송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발암 물질이 기준치보다 낮은 농도로 나왔다. 그러나 장기간 노출될 경우에는 장애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대법원은 지난해 8월 삼성전자 액정표시장치(LCD) 사업부 천안사업장에서 일한 또 다른 이 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1, 2심을 뒤집고 희소병인 다발성경화증의 첫 산재를 인정했다.
이 판결문에도 “유해화학물질 측정 수치가 작업 환경 노출 허용 기준 범위 안에 있다 하더라도 저농도로 장기간 노출될 경우 건강상 장애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적혀 있다.
익명을 요구한 산업계 관계자는 “도시락, 피자, 돈가스, 훈제 닭, 소시지 등 즉석 식품에도 발암물질이 나온다”면서 “그런 물질이 기준치 이하로 측정됐는데 단지 '나왔다'는 이유 하나로 이런 판결을 낸다면 모든 병을 산재로 인정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산재 인정 판결문에는 “주야간 교대 근무로 햇빛 노출이 부족, 비타민 D 결핍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추정도 나왔다. 주야간 교대 근무를 하는 곳은 반도체 디스플레이뿐만이 아니다.
고용부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이렇게 산재 인정을 받은 8개 병(백혈병, 다발성경화증, 재생불량성빈혈, 난소암, 뇌종양, 악성림프종, 유방암, 폐암)에 대해 역학 조사 과정을 생략, 신속하게 산재 처리가 되도록 절차를 변경한다고 6일 발표했다.
임우택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안전보건 본부장은 “이미 근로자 보호라는 관점에서 과학 및 의학 근거를 뛰어넘어 가능성이 있다는 식으로 상당히 포괄해서 인정해 주는 것이 최근의 판례”라면서 “판례를 인용하겠다는 것은 과학 근거가 없는 판례를 기반으로 그야말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산재 인정을 해 주겠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산업계는 산재보험료를 내는 기업 당사자 의견을 전혀 묻지 않은 일방통행식 제도 변경이라며 반발했다. 그동안 고용부는 제도 개선 시 노사 측 의견을 물어 왔지만 이번에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주평식 고용부 산재보상정책과 과장은 “법원 판결을 존중해 행정 절차를 일부 바꾸는 것이어서 이번에는 노사 양쪽 모두에게 의견을 듣지 않고 통보만 했다”고 말했다.
산업계 관계자는 “지금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기업이 산재보험법과 별개로 직업병에 걸렸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거액 보상을 해주고 있다”면서 “제도를 개선할 때 기업에 묻지도 않고 별도로 보상까지 해 줄 거면 산재보험법이 왜 필요한가”라고 반문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