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스티븐 엘롭 노키아 최고경영자(CEO)가 “(노키아가)불타는 플랫폼에 서 있다”면서 “대폭적이고 획기적 변화를 해야할 때”라고 밝혔다. 노키아가 혁신에서 경쟁사에 뒤지는 것을 자인한 것이다.
그는 “아이폰이 처음 나온 게 2007년인데 노키아는 아직까지 비슷한 제품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면서 “중가제품군에 있는 심비안은 북미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는 것으로 판명나는 등 경쟁사에 계속 뒤처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엘롭 CEO는 “노키아를 바꾸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면서, 역설적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과감하게 움직일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역설했다.
노키아는 한때 세계 휴대폰 시장을 호령했지만 2007년 아이폰 등장을 계기로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시장에서 급격히 밀려났다.
2013년 마이크로소프트(MS)에 휴대폰 사업부를 매각하고, 통신장비에 집중하는 등 노키아는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노키아 브랜드 라이선스를 보유한 HMD 글로벌은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반면, 노키아는 통신장비 시장에선 나름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노키아 사례는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영원한 1등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차 깨닫게 한다.
노키아가 사라진 이후 스마트폰 시장에선 혁신을 선도한 삼성전자와 애플이 글로벌 양강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약속이나 한 듯 삼성전자·애플의 기세도 이전만 못한 게 사실이다. 이와 달리 중국 화웨이, 샤오미, 비포, 오포 등 성장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애플이 노키아의 전철을 답습할 지, 아니면 혁신을 지속해 중국 제조사를 압도하고 경쟁우위를 지속할 지는 장담할 수 없다. 노키아의 과거와 현재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저기 건물 세 동이 원래 노키아 것이었는데 매각 후 다른 기업이 사용합니다.”
핀란드 기업 관계자가 헬싱키 포카란카투(Porkkalankatu) 거리에 위치한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포카란카투는 핀란드 정부기관과 글로벌 기업이 밀집한 지역이다. 핀란드 무역협회 격인 '팀 핀란드'도 이곳에 사무실을 운영한다.
이전에 노키아가 사무실을 운영했다던 세 동짜리 대형 건물에는 게임사 슈퍼셀 등 신진 핀란드 출신 글로벌 기업이 자리 잡았다.
노키아가 단말 부문을 마이크로소프트(MS)에 매각한지 4년이 훌쩍 지났다. 노키아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중반까지 세계 휴대폰 점유율 1위를 자랑하던 회사다. 스마트폰 시대로 진입하며 급격히 단말 부분 경쟁력을 잃었다. 한 때 핀란드 경제를 상징하던 노키아는 지금 어떤 모습일지 헬싱키 현지를 둘러봤다.
핀란드에서 노키아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헬싱키에 약 10년간 거주한 한 교민은 “노키아 휴대폰 사업이 잘 나갈 때는 건물, 트램,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 노키아 기업·상품 광고를 매일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대중 노출은 거의 없어졌다”고 말했다.
광고도 찾기가 쉽지 않다. 헬싱키 중심상권으로 분류되는 깜삐(Kamppi) 쇼핑센터에서 익숙한 노키아 브랜드 로고를 목격할 수 있었다. 헬싱키에 도착한 지 5일 만에 처음이다.
노키아는 게임사와 공동으로 5G(5세대 이동통신) 프로모션을 펼치고 있었다. 노키아 5G 통신장비 성능을 강조하는 취지다. 게임을 시연하는 이벤트가 중심이고 노키아 이동통신 장비는 한쪽에 전시했다.
행사 관계자는 “헬싱키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노키아 통신장비 성능을 보여주는 이벤트 성격도 포함했다”고 설명했다. 통신장비 단독으로는 성능을 보여주기 힘드니 게임과 연계한 마케팅을 펼치는 것이다.
◇중저가 라인에서 다시 시작하는 노키아 단말 DNA
노키아는 휴대폰 사업을 멈췄지만 그 유산은 남아서 명맥을 잇고 있다. 노키아 전 직원들이 주축이 돼 설립한 HMD글로벌은 지난해부터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을 출시했다. MS가 이들이 노키아 브랜드를 쓸 수 있도록 라이선스를 줬다.
상품은 핀란드에서 기획하고 제조는 중국에서 하는 '디자인 바이 핀란드 메이드인 차이나(Design by Finland Maid in China)' 제품이다.
핀란드 최고급 백화점인 스톡만 백화점 지하에 위치한 전자상가를 둘러보니 HMD 글로벌이 2017년 8월 출시한 최신 스마트폰 '노키아8'이 눈에 띄었다.
CPU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5.3인치 WQHD(2560x1440) 디스플레이와 1300만화소 짜이쯔 듀얼렌즈를 채택한 준수한 사양의 스마트폰이다. 저장용량 64GB 제품을 339유로(약 43만원)에 팔았다.
애플과 삼성 등 고가 스마트폰 제조사가 독자 매장을 가진 것과 달리 노키아는 화웨이, 소니 제품과 같은 공간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400~500유로 사이에 판매되는 화웨이, 소니보다 저가 라인이다.
매장 직원은 “아직 노키아 스마트폰 판매량이 높지는 않다”면서 “가격을 고려하면 성능은 다른 브랜드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해당 직원은 “피처폰 시장에서는 여전히 노키아가 제품이 많고 성능이 좋다”고 덧붙였다.
핀란드에서 가장 큰 종합 전자상점 베르꼬까우빠(verkkokauppa) 직원은 “노키아 스마트폰이 다시 나온다는 것은 이제 사람들이 인식하는 단계”라면서 “고가 라인 고객보다는 중국 중저가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에게서 수요가 있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세계 최대 통신장비 회사로 거듭나
핀란드 정부 관계자는 “아직 (새로 시작한)노키아 스마트폰은 핀란드인도 잘 쓰지 않는다”면서 “노키아는 이제 세계 최대 통신장비 회사”라고 강조했다.
'세계 최대'를 강조하는 대목에서 노키아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노키아는 단말 부문을 MS에 넘긴 후 2016년 프랑스 통신장비 회사 알카텔루슨트를 인수했다.
판란드는 노키아 사업 재편 후 로비오, 슈퍼셀 등 글로벌 게임기업이 혁신성장 DNA를 이어간 것으로 유명하다.
판란드에서 게임 스타트업을 운영했던 한 교민은 “노키아가 스마트폰 사업에서 고전하며 핀란드 경제가 다른 북유럽 국가에 비해 나쁜 지표를 보였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노키아 인력이 다른 산업에 흡수됐다기보다는 IT 문화에 익숙한 사회 전체 분위기가 게임 등 새로운 산업에 도전한 배경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노키아 단말 부문 인력 7800여명은 MS 피인수 후 2015년 9월 해고 전까지 대부분 MS 소속으로 근무했다. 모바일게임 '앵그리버드'를 만든 로비오는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전성기였고, 슈퍼셀은 2013년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노키아가 여전히 단말에 도전하고 있을 때 새로운 혁신 싹이 튼 셈이다.
노키아 단말 부문 인력 중 일부는 새로운 환경에 도전한다. 스마트폰용 블록체인 OS를 만드는 핀란드 스타트업 지피(Zippie)에는 노키아 개발자가 함께 한다.
안티 사르지오 지피 대표는 노키아 스마트폰 OS 심비안과 미고 프로젝트를 계승한 욜라(Jolla) 창업자다. 사르지오 대표는 “스마트폰용 블록체인 OS '블랙튜어'를 개발하는데 노키아 출신 인력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헬싱키(핀란드)=김시소 기자 sis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