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발표한 대통령 개헌안에서 과학기술계가 주목하는 것은 그동안 독소조항이라고 비판해 온 헌법 제127조 제1항이다.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해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가 실시한 최근 여론조사에서 2280명의 응답자 가운데 73%가 이 조항의 개정을 요구했었다. 1987년 개정 당시 제9장 경제 조문에 포함됐다. 지금까지 수차례 개헌이 있었지만 이번만큼 과학기술계 관심이 높은 적은 없었다.
이 조항을 과학기술계가 문제 삼는 이유는 과학기술을 경제발전 도구로 보기 때문이다. 국가경쟁력 강화나 국민의 삶 증진 같은 시대정신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일 때 과학기술 역할이 선진국에 진입한 이후와 같을 수가 없다. 과학기술은 이제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사회문제 해결과 일상생활에도 깊숙이 자리 잡았다. 사회적 논란이 된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인공지능(AI)과 4차 산업혁명, 미세먼지와 교통통제, 지진과 원자력이 그 예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는 더 구체적 주문을 하고 나섰다. 전문과 총강에도 과학기술 관련 내용을 넣어야 한다고 했다. 헌법 전문에 나오는 정치·경제·사회·문화에 과학기술을 추가하자고 했다. 총강에는 '국가는 미래사회에 대비하고 산업·경제의 발전과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기 위해 과학기술 진보에 노력해야 한다'를 넣자고 했다. 제22조 제3항에 '모든 국민은 과학기술 성과의 이익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를 추가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제127조 제1항은 '국가는 경제·사회·과학기술 발전의 기반이 되는 국가표준제도를 확립한다'로 수정하자고 했다. 과학기술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대등하고도 독립적인 가치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개헌안에서 본문 제134조 제1항에 이러한 요구가 집약·반영됐다. '국가는 국민경제의 발전과 국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기초 학문을 장려하고 과학기술을 혁신하며 정보와 인력을 개발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청와대는 취약한 기초 학문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 기초 학문을 장려한다는 문 대통령 뜻을 담았다는 설명이다. 국민경제 발전과 더불어 '국민 삶의 질 향상'이 추가된 것도 더 이상 과학기술이 경제발전의 수단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전문과 총강에까지 반영되기를 바라는 일부 과학기술계 요구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과학기술 역할과 가치가 제자리를 찾은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국민 삶의 질 향상'과 관련해서는 보다 상세한 유권해석이 필요하다. 이는 사회 여건과 생활, 자연환경, 문화와 교육 등에 과학기술이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정치와 행정, 국방과 정보, 치안과 재난·안전 등을 통한 국민 삶의 질 향상에 과학기술이 역할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헌법에 모든 내용을 상세하게 담을 수 없으니, 개헌 후 과학기술기본법 등 관련 법률 개정으로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이번 개헌안에 과학기술계가 주목할 조항들이 또 있다.
제11조 제1항이다. 이번에 평등 개념이 '성별·종교·장애·연령·인종·지역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로 확대됐다. 이는 과학기술 관련 차별을 시정하는 데 근거가 될 수 있다. '정치 공학', '고문 기술자', '기계적 사고'와 같이 선진국에서는 차별행위로 범죄가 될 용어가 아무런 죄책감 없이 무차별 사용되는 일이 사라질 것이다.
또 하나는 제23조 제2항이다. 학문과 예술의 자유와 더불어 '대학의 자치는 보장된다'고 한 부분이다. 그동안 국가가 대학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고위공무원을 대학에 상주시키고 대학 행정에 일일이 간섭해 온 관행을 끊을 수 있게 됐다. 영국의 여러 대학 총장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정부에 대항하여 쟁취한 것이 대학의 자치 전통이다. 이번 기회에 '정부는 지원을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확립돼야 한다. 학자들이 권력과 사회 비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건강한 나라다.
임춘택 광주과학기술원 교수 ctrim@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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