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통상자원부가 기술 유출 심사 기구인 산업기술보호위원회를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품목별로 세분화하는 것을 골자로 산업기술유출방지법을 개정한다. 현행 전기전자 분야로 통합된 위원회에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한 취지다. 법이 개정되면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대기업의 해외 투자 승인 심사가 좀 더 깐깐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산업부는 이미 LG디스플레이가 신청한 중국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공장 투자 심사를 위해 별도의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앞으로 반도체, 이차전지 분야의 해외 투자에도 이 같은 방침이 적용될 전망이다. 산업계는 정부 방침에 해외 투자가 사실상 어려워질 수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26일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오는 10월 산업기술보호법을 일부 개정해 현행 전기전자 분야 산업기술보호위를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분야로 세분화해 운영할 계획”이라면서 “위원회 전문성을 강화하고 국가 핵심 기술 수출 승인 심사 시 기술 유출 위험성을 더욱 명확하게 따져보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산업 기술의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약칭 산업기술보호법)'에 따라 국가 핵심 기술로 지정된 메모리 반도체와 OLED 디스플레이 패널 기술은 수출 시 산업부 장관 소속으로 지정된 전기전자 산업기술보호위의 승인을 받거나 신고 시 허가를 취득해야 한다. 지금 활동하고 있는 14명의 위원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에너지, 국가정보원,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한국산업기술보호협회 등 다양한 기관에 속한 인물들로 구성돼 있다. 이를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분야로 각각 세분화해 전문성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디스플레이 분야에선 이미 10여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여기 소속된 인사들이 개정에 맞춰 법률 지위를 획득한 디스플레이 분야의 산업기술보호위로 재출범할 예정이다. 산업부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분야에서도 협회, 관련 학회와 공조해 위원회에 참여할 위원을 추천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관련 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기술 수출 승인 심사가 까다로워지면 투자 계획이 늦춰지거나 아예 수출 승인 자체를 거부당해 중국 투자길이 막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18일 백운규 산업부 장관이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계 간담회에서 국내 대기업에 중국 진출을 재검토하는 것이 좋겠다는 발언을 한 이후 이뤄지는 법 개정이어서 수출 승인을 받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했다.
산업계 관계자는 “백 장관이 반도체 디스플레이 간담회 현장에서 한 발언을 보면 공장이 나가면 협력업체나 현지 채용 인력을 통해 어쩔 수 없이 기술이 빠져나간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위원회 소속 위원들도 이러한 생각으로 심사에 임한다면 중국 투자 길이 아예 막힐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8월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에 앞으로 3년 동안 7조8000억원을 투입, 3D 낸드플래시 2기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이미 산시성과 공장 건설을 위한 양해각서(MOU)도 교환했다. SK하이닉스도 우시시 D램 증설 투자를 발표했다. LG디스플레이는 광저우시와 합작, 8세대 대형 OLED 공장을 짓기로 하고 승인 심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심사 일정이 길어져 적기 투자에 실패하고 현지 시장을 놓칠까 걱정하고 있다.
학계에선 이 같은 정부 방침에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정부가 기업 경영에 과도하게 개입하면 예상치 않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지만 국가 핵심 기술을 중국에 계속 내보내면 기술이 유출되고 결국 토사구팽 당할 수 있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학계 관계자는 “디스플레이 패널은 관세·물류비와 현지 시장 공략이라는 당위성이 있고, SK하이닉스도 과거 유동성 위기 시절에 중국 지방 정부의 투자금을 받기 위해 현지에 공장을 세운 불가피성이 있다”면서 “그러나 정부는 삼성전자가 중국에 3D 낸드플래시 공장을 계속 증설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기업과 비교, 당위성 또는 불가피성에서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 배옥진 디스플레이 전문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