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간에도 신뢰관계를 쉽고 빠르게 구축할 수 있는 기술·사회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신뢰'가 그렇게 큰 문제인가 하겠지만 디지털 트윈, 디지털 팩토리, 자율 주행, 빅데이터를 활용한 혁신 융합 서비스에서 신뢰에 대한 기술·제도 기반이 없다면 우리나라는 글로벌 플레이어가 될 수 없다.
신뢰는 양방향성을 띤다. 단순히 모르는 상대를 믿으려면 신뢰를 주는 자는 엄청난 위험이나 손실을 감내해야 한다. 그 위험 정도는 때때로 상상조차 어려울 정도로 커서 거래가 단절되고 사회는 퇴보한다. 흔히 이야기하는 '톨레랑스(관용)'는 모르는 상대를 먼저 믿어 주는 순진한(?)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미덕이 유지되려면 신뢰를 주는 자가 신뢰를 먼저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신뢰 받는 상대 신뢰성도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신뢰를 주는 쪽과 받는 쪽 서로의 특성 평가와 기대가 맞아떨어져야 신뢰 관계가 제대로 형성될 수 있으며, 그래야 교류나 거래가 일어날 수 있다.
신뢰는 협력과 경쟁에서 △공정성 확보 △거래비용 절감 △생산 효율성 증진 △선택 대안 확대 등으로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지만 그 기반 구축에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
아날로그 시대에 사람이나 조직 간 신뢰는 직접 보고 만나서 판단하거나 혈연·지연 관계, 종교 같은 신념의 공유, 제3자 보증 같은 방법으로 상당한 시간을 들인 가운데 불완전한 내용으로 한정된 범위에서만 이뤄졌다.
디지털 사회에서는 수많은 대상(사람뿐만 아니라 다양한 조직, 사물까지 포함) 간의 교류(거래, 협력, 경쟁)가 다양한 형태로 '생각의 속도만큼' 일어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즉 한 번도 본 적 없고 앞으로 만나지도 못할 수많은 사물, 사람과 글로벌 규모 범위로 신뢰 관계를 빠르게 검증하고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신뢰 기반 구축을 위해선 정보통신기술(ICT) 혁신도 중요하고, 신뢰에 대한 사회 규범이나 절차 및 가치 공유 방식의 변화도 중요하다.
신뢰에 대한 기술 투자나 개별 신뢰 구축 과정은 개인과 민간 기업에 맡겨 두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 신뢰 관계에 대한 정부의 규제는 대체로 기술 발전과 경쟁 환경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작은 부작용은 피하게 하더라도 큰 도약은 미리 차단한다.
그런 규제는 오래 될수록 발전과 성장에 짐이 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갉아먹는다. 우리나라에서만 통하는 갈라파고스식 제도, 정책, 절차, 기술 표준으로는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나라 산업 간 칸막이 규제, 과거 액티브X로 대표되는 기술(규격) 규제, 인터넷뱅킹, 원격 의료, 융합 서비스 산업 규제에서도 잘 경험했다.
ICT를 이용해 글로벌 신뢰 기반 구축에 성공한 민간 비즈니스 사례를 살펴보자. 가상화폐 비트코인은 정부 규제를 받지 않고 투명성, 공정성, 익명성, 편리성, 보안성, 신속성을 확보했다. 알지 못하는 상대와 금전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신뢰 관계 기반을 구축, 새로운 '돈'을 창출해 냈다. 중국 알리바바는 기업간(B2B) 전자상거래에서 ICT를 이용, 전 세계 구매자가 중국 중소 제조기업과 전자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알리바바는 짧은 시간에 세계 기업으로 성장, 중국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이에 반해 ICT 선진국이라고 자랑하던 한국은 어떤가. 해외 고객은 한국 전자상거래 플랫폼을 쉽게 이용하지 못하지만 한국 소비자는 아마존과 타오바오를 아주 쉽게 활용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알리바바, 비트코인, 아마존 등이 정부 지원이나 규제 방패로 사업을 시작하거나 성공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의료 서비스, 한류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정체를 보이는 것은 언어 장벽만이 아니라 교류·협력·경쟁·거래를 위한 신뢰 관계를 제대로 만들지 못한 제도나 시스템 상 문제가 더 크다.
우리나라에서도 ICT를 활용해 모든 교류에서 신뢰 관계 기반을 효과 높게 구현하고, 이를 통해 미래 먹거리를 만드는 것이 ICT 관련 인력·기업·정부의 책임이다. 이제라도 정부와 기업은 자기 혁신을 해야 한다. 정책이나 법률에서는 신뢰 관련 개별 기술이나 신뢰 관계 구축 과정을 직접 세세하게 다루는 것보다는 사회 가치 제시와 공유, 이를 수행할 수 있는 큰 틀을 제시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기업은 신뢰 관련 ICT의 개발 노력과 함께 그 혁신 기술을 창의 비즈니스 모델로 구현하는 능력을 기르고, 개방된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춰야 한다.
김우봉 건국대 명예교수(경영학) wbkim@konkuk.ac.kr
-
김현민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