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케케묵은 현대차 '패스트 팔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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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해외 출장길에서 만난 현대자동차 직원과 나눈 대화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당시는 현대차 연구개발(R&D) 투자비가 일본 토요타에 비해 15% 수준밖에 안 된다는 기사가 국내외에 쏟아지던 때다. 그러나 현대차의 전략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직원은 “토요타처럼 무리하게 R&D할 필요가 있는가. 10가지 R&D에 투자했을 때 실제 시장에서 성공할 확률은 10%도 안 된다”면서 “우리 현대차는 시장에서 이미 검증된 기술만 빠르게 받아들인다. 혹시 시장에서 잘 못 나가면 빠르게 수정·조치하는 게 핵심 전략이다”고 말했다.

조금은 의아했지만 한편 그럴 듯하게 들렸다. 굳이 실패할 확률이 높은 선행 기술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것보다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가 경쟁에 더 유리할 수 있다는 것으로,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토요타는 2009년 급발진 사태로 초대형 리콜 사태를 겪은 이후 과감한 R&D 투자로 하이브리드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 친환경 차량 분야의 글로벌 선두 기업으로 입지를 굳건히 다졌다. 수소연료전지전기차(FCEV) 역시 대량 생산, 상용화에 성공했다. 토요타 '캠리'는 1997년부터 지금까지 2001년 단 한 차례를 제외하고 북미 승용차 시장에서 판매 1위 자리를 유지하며 새 역사를 써 나가고 있다. 캠리 역사를 보면 안전성과 연비 향상, 친환경성까지 우리 시대의 자동차로서 새로운 길을 열어 온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토요타는 선행 기술 투자로 또 한 번의 과감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최근 친환경차 전략을 대폭 수정했다. 배터리전기차(BEV)는 개발하지 않겠다고 한 당초의 전략과 달리 세계 친환경차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2020년에 다수 BEV 모델을 내놓기로 했다. 이 타임 컷조차 2019년으로 앞당겼다. 수십년 동안 놓치지 않은 내연기관의 체질을 신속하게 벗어 던진 것이다.

반면에 현대차는 미국과 중국 등 해외 시장에서 최악의 판매 실적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안전성, 성능 대비 가격 경쟁력이 뛰어나다는 이미지까지 점차 희석되고 있다. 미래 자동차 시장의 핵심인 친환경차나 자율주행차 시장에서도 선도 이미지는 물론 참여 의지까지 약하다.

전기차는 글로벌 경쟁사보다 시장 출시도 2년가량 뒤처졌다. 당당하게 여겨지던 패스트 팔로어 전략은 이제 버릴 때가 됐다. 전기차에선 선도자는 물론 추격자 입장에서도 창피한 정도의 성적이다. 미국·유럽 전기차 시장에서 10위권에 든 모델조차 찾아 볼 수 없다.

해외에서 만난 현대차 직원을 최근 다시 만났다. 최근 '판매 부진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몇 가지를 원인으로 꼽았지만 그가 강조한 대답은 '선행 기술 부재'였다. 몇 년 전에 나눈 대화를 되묻지는 않았지만 지금 시장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데에는 대체로 공감했다.

일본 자동차업계는 선행 기술을 선점하며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다. 중국의 자동차 완성도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 가고 있다. 독일 자동차는 신뢰와 브랜드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영원한 강자의 입지를 다졌다. 미국은 선두권을 위협할 정도의 자국 시장 기반이 든든하다.

그렇다면 현대차의 강점은 무엇인가. 현대차는 한국 자동차 산업을 이끌고 있는 중심이다.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세계 5위까지 오른 저력을 과감한 체질 개선으로 다듬어 이제 진짜 실력을 발휘할 때다.


박태준 자동차 전문기자 gaius@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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