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일본 정부는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정부자금 25억달러를 투자해 소니, 도시바, 히타치 3개사의 디스플레이 패널 사업부를 통합한 재팬디스플레이(JDI)를 출범시킨 것이다. 당시 3사가 글로벌 액정표시장치(LCD) 업체 간의 과도한 경쟁으로 어려움을 겪자 민관 투자기관인 일본산업혁신기구(INCJ) 주도로 통합 작업을 진행했다. JDI는 현재 산업혁신기구가 35.58% 지분을 소유한, 사실상 공기업이다.
JDI는 애플 아이폰에 패널을 공급하며 스마트폰용 소형 디스플레이의 세계 최대 제조사로 등극했다. 그러나 JDI는 디스플레이 세대 교체로 다시 시험대에 섰다. JDI는 그동안 고해상도 LCD패널로 스마트폰 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나 스마트폰용 패널 대세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로 점차 전환되면서 새로운 고비를 맞고 있다. 새로운 조류를 맞아 한국에 디스플레이 주도권을 뺏긴 일본 정부와 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일본 디스플레이업계는 다시 `명가 재건`을 외치고 있다. 일본은 한때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일본산 패널이 시장 점유율 100%에 가까울 정도였다. 2001년 샤프가 브라운관을 대체하는 평면 TV `아쿠오스`를 내놓으며 일본 기업은 디스플레이 시장을 선도했다. 일본의 대표 전자메이커는 대부분 디스플레이 사업에 참여했다. 파나소닉이 PDP, 샤프가 LCD로 각각 유명하지만 히타치·도시바·NEC·소니 등도 LCD 사업을 했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 대만의 물량 및 가격 공세로 어려움에 처한 일본 기업은 LCD 사업을 축소하거나 매각했다. 지난해에는 파나소닉이 적자 누적에 따라 TV용 LCD 패널을 생산하는 효고현 히메지 공장을 폐쇄했다. 이에 따라 일본 디스플레이 기업 가운데 현재 LCD 패널을 독자 생산하는 곳은 샤프와 JDI뿐이다.
일본 정부는 기술의 해외 유출을 우려해 JDI라는 기업 연합을 만들었다. 그러나 JDI의 미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JDI는 LCD 기술력을 바탕으로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성공, 순탄한 성장세를 보였다. LG와 삼성, 샤프를 누르고 아이폰에 가장 많은 디스플레이를 공급했다.
그러나 이제 판이 뒤집히고 있다. 아이폰도 OLED로 선회하고 있고, 중국에서도 OLED 디스플레이를 양산하고 있다. 저가폰에서도 OLED 디스플레이가 들어가는 시대가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이폰 판매 감소로 JDI는 경영난에 처했다. 일본 정부는 최근 JDI에 750억엔(약 7630억원)의 자금을 긴급 수혈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JDI 지분을 전량 매각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사업 구조를 OLED 중심 전환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JDI는 수혈 자금을 OLED 등에 투자, 한국 기업에 대항할 발판을 마련할 계획이다. 오는 2018년부터 중소형 OLED를 양산하기 위해 생산 라인을 구축한다.
JDI는 “화웨이나 오포 등 중국 스마트폰 업체의 수요가 회복되고 있다”며 정부 지원을 받아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일본 기업은 과거 OLED를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내다보고 개발에 나섰다가 엄청난 투자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어 2014년께 대부분 철수했다. 그러나 삼성과 LG가 지속 투자, 스마트폰과 TV에 OLED를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시장은 폭풍 성장했다.
조사기관 IHS는 OLED 시장 규모가 2015년 124억달러(약 14조원)에서 2022년에는 317억달러(37조원)로 커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일본 업체들은 이처럼 높은 성장이 예상되는 OLED 디스플레이 시장의 95%를 삼성과 LG가 장악하고 있는데 따른 위기감을 느끼고 서둘러 재진입에 나서고 있다.
JDI는 현재 15%인 JOLED 지분율을 50%까지 높여서 내년 자회사로 편입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JOLED는 JDI가 2015년에 소니, 파나소닉과 손잡고 세운 OLED 패널 제조사다. 애플에 패널을 공급하는 등 LCD 시장에서 입지를 다져 온 JDI 기반에 JOLED의 역량을 보태 OLED 시장 점유율 확대에 나설 방침이다.
지난해 대만 기업 폭스콘에 인수된 샤프도 약 2000억엔을 투입, OLED 디스플레이 개발에 나설 계획을 밝혔다. 일본 서부 오사카현 사카이 공장 OLED 라인에 2000억엔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2018년까지 시제품을 생산하겠다고 예고했다.
또 모회사 폭스콘과 함께 중국 허난성 정저우에 1000억엔을 투자, OLED 생산 라인을 건설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저우에는 이미 아이폰을 조립하는 폭스콘 공장이 위치해 있어 같은 지역에 디스플레이 공장을 건설하면 경쟁 업체에 비해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샤프가 원천 기술을 갖고 있는 이그조(IGZO) 패널도 샤프 부활에 일조할 전망이다. IHS에 따르면 애플은 올해 2분기부터 노트북 `맥북프로` 시리즈에 이그조 방식 패널을 탑재한다. 이그조는 기존 LCD 패널에 사용되고 있는 비결정 실리콘보다 전자 움직임이 4배나 커서 전력 소모량도 매우 적다. 터치감도 좋으며, 디스플레이의 해상도도 높아진다.
이그조 LCD패널은 샤프가 원천 기술을 보유하며 주력 상품으로 내세우고 있는 기술이다. IHS는 샤프와 삼성디스플레이가 지난해 4분기 기준 글로벌 이그조 LCD 패널 시장에서 70% 이상 점유율로 과점 체제를 구축했다고 진단했다. IHS는 애플이 올해 맥북프로용 디스플레이 970만대를 발주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1년 전의 880만대보다 늘어난 것이다. 궈타이밍 폭스콘 회장은 샤프 인수 당시 전체 디스플레이 생산량의 60%를 이그조 LCD 패널, 40%를 올레드패널로 각각 전환하겠다며 기술력과 시장 확대에 자신감을 보였다.
한국 기업 견제도 시작됐다. 샤프는 지난해 12월 14일 자사 최대 고객사인 삼성전자와 LG전자에 TV용 LCD 공급 중단과 함께 거래 중지도 선언했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40~70인치대 중대형 패널의 약 10%를 샤프에서 공급받아 TV 완제품을 생산했다.
세계 TV용 패널 시장에서 폭스콘·샤프 연합의 점유율은 20.4%로,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샤프는 40인치대 이상 LCD TV 출하량 목표를 연간 600만대에서 1000만대로 높였다. 또 샤프에서 생산하는 LCD 패널 물량을 샤프 TV사업부에 몰아주기로 했다. 재도약에 나선 일본 디스플레이 업계의 발빠른 움직임이 시작됐다.
권상희기자 sh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