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에서 승승장구했다. 사업 진출을 반대한 사람들을 무안하게 만들 정도였다. 세계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해 세상을 놀라게 했고, 설계·제조·패키징에 이르는 생산 기술을 내재화해 세계 반도체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잘나가던 삼성도 고민이 있었다. 반도체 원자재를 전량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장비의 작은 부품, 심지어 나사 하나까지도 수입해야만 했다. 이는 삼성전자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1994년에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일본에서 들어오기로 한 장비 입고가 지연된 것이다. 반도체 구매팀은 입고 지연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993년은 삼성전자가 세계 반도체 역사를 다시 쓴 해다. 삼성전자는 1993년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1위 자리에 올랐다. 256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일본과 미국 산업계는 경악했다. 삼성을 견제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핵심 장비와 부품 납기를 지연하거나 판매 자체를 자국 고객사 우선으로 돌리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장비 가격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 값을 쳐 줘도 제때 받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대규모 입고 지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는 삼성전자가 장비와 소재, 부품 국산화를 추진하게 된 계기가 됐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던 김광호 부회장은 장비와 부품 국산화를 진두지휘했다.
당시 한국의 반도체 후방산업계는 매우 취약한 상황이었다. 협력사는 장비와 부품을 수입해서 파는 중간 대리점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장비를 수입하는 업체에 “함께 한번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적극 했다. 일본과 미국이 후방산업 기술을 무기로 삼성전자를 견제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 같은 저항이 오히려 한국 반도체 후방산업계를 키우는 씨앗이 됐다. 성공 대표 사례가 바로 피에스케이(PSK)다.
박경수 PSK 대표는 1980년대 중반부터 반도체 장비를 수입하며 삼성전자와 인연을 맺었다. 박 대표는 1990년 일본 PSC와 합작으로 PSK를 설립하고 회사의 비전을 `장비 국산화`로 잡았다. 국산화 장비 품목은 애셔(Asher)다. 애셔는 노광 공정 후 웨이퍼에 남아 있는 감광액 찌꺼기를 제거하는 장비다.
PSK는 설립 후 200㎜ 웨이퍼용 애셔 개발 작업을 삼성전자와 공동으로 수행했다. 삼성전자는 최대한 많은 계획과 요구 사항을 공유하며 장비 국산화를 독려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 업체가 200㎜ 애셔 개발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소식을 접한 PSK 연구진은 “우리가 성공할 수 있을까” 하며 우려했다. 박 대표는 연구원들을 설득해 가며 기술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라인을 멈추면서까지 테스트를 돕는 등 전폭 지원했다.
1996년에는 도전 개발 과제인 싱글타입 애셔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전까지 일본의 주력 애셔 제품은 배치(Batch) 타입이었다. 배치 타입은 한 번에 웨이퍼 50~100장을 가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웨이퍼 직경이 계속 커지면 배치 방식보단 한 장씩 가공하는 싱글 타입이 유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처리 속도를 늘리는 것이 관건이었다. PSK는 고속 작동하는 싱글 타입 애셔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기존 장비에 필수로 적용되던 로드록(Load-Lock)을 없앰으로써 생산성을 크게 높인 애셔 장비도 개발했다.
PSK는 이를 발판 삼아 성장 가도를 달렸다. 삼성전자 역시 PSK 덕분에 애셔 장비를 원활하게 구매할 수 있었다.
PSK에도 시련은 있었다. 200㎜에서 300㎜ 애셔로 넘어가는 시간이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온 것이다.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1998년에 이어진 반도체 불황으로 회사 재정 상황은 악화됐다. 주변 협력사 몇 곳은 악화된 재정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기도 했다.
PSK는 1998년 300㎜ 애셔 개발을 본격 시작했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에서 근무하던 부장, 과장, 대리가 300㎜ 애셔 개발을 도왔다.
사실 PSK가 개발한 200㎜ 애셔는 생산 현장에서 잘 가동되고 있었지만 생산성이나 품질 면에서는 아직 외산 장비에 뒤처졌다. 조금 비싸더라도 외산 장비를 쓰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공정 엔지니어의 볼멘소리도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삼성의 수뇌부는 장비 국산화 프로젝트를 장기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산 장비 구매는 계속 늘려 나갔다. 이는 PSK가 불황에도 300㎜ 장비를 개발할 수 있게 된 든든한 배경이 됐다.
PSK는 300㎜ 애셔 기술 측면에서 외산 장비를 뛰어넘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웨이퍼가 가공되는 챔버(Chamber)를 2개로 늘려 생산성을 두 배 확대한 것이다. 외산 장비가 웨이퍼 100장을 처리할 때 PSK 장비는 일부 공간을 조금 더 쓰는 것만으로 200장씩을 처리할 수 있었다. 할 수 있다는 오랜 믿음과 도전정신, 계속된 지원과 기다림의 결과였다.
PSK는 이때부터 수출을 모색했다. 반도체 웨이퍼는 600회가 넘는 초미세 공정 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장비 하나를 바꾸는 건 상당히 큰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기술이 있다 해도 제안서만 제출해선 담당자가 심사에 포함시켜 주지도 않는다.
PSK의 경우 삼성전자에 장비를 공급한 이력이 일종의 `성공 사례`처럼 인식됐다. 실제 PSK의 장비를 테스트해 본 세계 각국의 반도체 생산 업체는 대단한 기술력을 보유했다고 평가하며 공급 계약을 서둘렀다. 현재 PSK는 애셔 장비 부문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다. 2015년 매출액은 약 1400억원이었다.
박경수 대표는 PSK를 종합 반도체 장비 업체로 키우겠다는 비전을 밝혔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말처럼 반드시 해내겠다는 의지와 열정으로 국산화를 이뤘습니다. 2021년까지 공정 전 분야에 대응하는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는 게 목표와 비전입니다.”
PSK의 성공 사례는 삼성전자의 사사(社史)에도 소개됐다. 박 대표는 삼성전자와의 상생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앞으로 1차, 2차 협력사라는 말보다는 장기 계획을 공유하면서 삼성전자가 하던 영역까지도 일정 부분 맡을 수 있는 0.5차 협력사가 생겨나면 좋겠습니다. 개방형 혁신을 넘어 혁신이 추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제 진심입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