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 흔들리는 R&D 현장…잠재적 범죄자로 몰린 교수·연구원

#최근 한 사립대 교수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부정청탁 및 금품 등의 수수 금지에 관한 법(청탁금지법, 일명 김영란법) 체험기를 올려 화제가 됐다. 이 교수는 외부 강의 사전 신고 과정의 감시당하는 느낌과 과잉 규제에 따른 제도 보완의 필요성 등을 솔직히 털어놨다.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국·공립대는 물론 사학재단 교수들은 모든 외부 강의를 사전에 신고해야 한다. 일부 대학은 주례를 서는 것까지 무조건 사전에 신고하라는 규정까지 마련했다. 잠재된 부정 청탁과 그에 따른 감시 대상으로 전락한 일선 교수들의 압박감이 연구 현장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외부 강연이나 회의 참석은 아예 하지 않겠다는 사례도 빈번하다.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곳곳에서 이 같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국가 연구개발(R&D)과 산·학 협력 현장이 차갑게 얼어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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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해 9월 외부 강의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해 강의 횟수와 시간을 월 3회, 6시간 이내로 제한했다.

해당 권고는 공무원 행동강령의 외부 강의 제한 규정보다 더 촘촘하다. 공무원 행동강령 제15조는 기관장이 외부 활동 횟수 상한을 정할 수 있다고 명시했지만 명확한 횟수는 규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탁금지법 시행이 맞물리면서 권익위의 권고를 가이드라인으로 삼는 대학과 연구기관이 늘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권고안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대학 교수는 강의와 연구뿐만 아니라 세미나, 자문회의, 학회 등에 참여하면서 활발히 외부 활동을 벌인다. 서면 신고로 기관장 승인을 받도록 하는 예외 조항이 있지만 교수 자율성에 제약을 줄 수 있다는 평가다.

한 국립대 교수는 “업무 특성상 자문회의에 참석해 과제를 평가하고, 사람 만나서 정보를 획득하고, 연구 교류를 계속 해야 한다”면서 “이런 활동이 비일비재한데 `과제는 따오고 나가지는 마라`는 현재 상황은 원칙상 말이 안 된다”고 털어 놓았다.

이에 더해 산업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기관은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눈치를 보며 복지부동하고 있다. 과제를 담당하는 책임자는 당분간 현장 방문을 자제한다. 법 해석이 모호해 외부 만남을 조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한 연구기관 관계자는 “당분간은 (외부) 사람을 안 만날 것이고, 당분간이 언제가 될지도 모르겠다”면서 “모호한 법에 대한 내부 문의 때문에 감사실도 거의 콜센터 분위기”라고 전했다.

청탁금지법 이후 외부 활동에 관해 복잡해진 행정 절차는 `손톱 밑 가시`로 작용하고 있다.

다른 연구기관 관계자는 “청탁금지법 이후 공문을 받아야지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바뀌어서 분위기가 불편해졌다”면서 “공문이라는 것이 며칠 전에 합의돼 올리고, 공람하고, 결제 받는 행정 절차가 들어가 결재 선상에 출장자가 있으면 늦어질 수밖에 없다. 갑자기 미팅할 상황이 생겼을 때 상대방과 공문을 교환하지 않으면 못 간다”고 밝혔다.

서울 지역 한 사립대 교수는 “결재할 사안이 많으니 학교에서 아예 결재선을 따로 만들어 외부 강의 출장 일정을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자의 외부 활동 과잉 규제를 포함해 청탁금지법 정비의 필요성은 이미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19대 국회 청탁금지법 제정 당시 법사위원장을 지낸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조차 “법 시행 이후에도 권익위의 해석과 규정이 오락가락하는 데다 모든 국민을 잠재 범죄자로 옥죄고 자기검열 압박을 받게 하는 청탁금지법이 사회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면서 “청탁금지법 전면 개정을 통해 불합리한 규제를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철강, 석유화학, 조선 등 공급 과잉 업종의 구조조정과 주력 산업 고도화가 시급한 가운데 정부 R&D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란 우려가 거세다. 전문가들은 우리 주력 산업을 고부가가치 구조로 바꾸기 위해 정부 R&D로 주춧돌을 놓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 정부가 최근 내놓은 철강, 석유화학 업종 경쟁력 강화 방안도 2023년까지 수소환원제철공법 개발(철강), 공급 과잉 품목 고부가가치화를 위한 R&D(석유화학)가 핵심이다.

하지만 R&D 현장이 경직되면서 성과가 나오기 힘들다는 분석이다.

업계 전문가는 “민·관이 협력해 산업 융합에 대비하고 우리나라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데 현재 분위기라면 소통에 제한이 일 수밖에 없다”면서 “건전한 산·학 협력과 R&D를 위한 제도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변상근기자 sgbyu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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