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대표의 첫 직장은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였다. 1985년에 장비 엔지니어로 입사했다. 당시 한국인 장비 엔지니어의 설움은 컸다. 외국인 엔지니어 옆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존재로 취급받았다. 지식도 경험도 없으니 장비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어께 너머로 기술을 익히는 데 힘을 쏟았다.
황 대표는 현대전자 입사 8개월 만에 사직서를 던지고 유럽계 장비 업체 A사의 국내 영업 대리점으로 옮겼다. 첫 업무는 본사 간부나 바이어의 숙소를 정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삼성전자로 판매된 장비가 설치 도중에 고장이 났다. 미국, 홍콩 등에서 전문 기술자가 왔지만 한 달 동안 해결하지 못했다. 삼성전자는 발을 동동 굴렀다.
황 대표는 `내가 해보겠다`며 나섰다. A사는 당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에게 일을 맡겼다. 얼마 안 있어 고장 난 장비는 완전히 고쳐졌다. 황 대표는 이후 해당 고객사의 `전담 엔지니어`로 일하게 됐다. 입사 4년이 지나면서 그의 실력은 본사 엔지니어를 훌쩍 앞설 정도로 높아졌다. 삼성에선 그를 `국내 최고 장비 엔지니어`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매일 새벽 6시에 삼성 반도체 공장으로 출근해 밤 10시까지 일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매일 장비 상태와 공정 흐름의 변화를 지켜봤다. 장비 요소요소도 철저하게 분석했다. 그의 기록 습관은 대단했다고 주변 인물들은 평가한다. 황 대표는 집으로 돌아오면 생각을 더듬어서 닥치는 대로 중요한 사항을 기록했다.
그는 1990년대 초·중반까지 A사에서 일했다. A사의 주력 제품인 증착 장비의 A부터 Z까지를 모두 머릿속에 넣었다. 반도체 공정, 장비는 물론 고객사 영업 방식도 배웠다. 그러나 A사는 침몰하는 함선이었다. 고객사 요구에 대응하는 신장비 출시가 늦어지면서 매출은 계속 떨어졌다. 급기야 1993년 국내 철수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황 대표는 그때 이직 대신 창업을 택했다. A사 근무 시절에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장비 개조, 업그레이드 사업을 했다. 개인 사업으로 시작한 이 일로 주성엔지니어링 창업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 삼성 내에서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아직 법인도 설립되기 전인데 삼성전자로부터 증착 신장비 개발 주문을 받기도 했다. 황 대표는 1995년 4월 주성엔지니어링 설립 후 이 같은 과제를 성공리에 수행해 낸다. 이후 고객사를 확장하며 회사를 키워 나갔다.
“한국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할 수 없다`는 잘못된 인식을 바꾸기 위해 회사를 창업한 거였죠. 당시 첨단 장비에는 우리나라가 만든 나사못 하나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선입견이 팽배했어요. 기술이나 지식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입니다.”
황 대표의 당시 회고다.
운도 따랐다. 마침 고객사 공장에서 놀고 있는 증착 장비를 몇 개월 동안 마음껏 활용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수십억원씩이나 하는 장비들을 분석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정부는 장비 국산화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일정 부분 국책과제 지원비도 받을 수 있었다. 주성엔지니어링은 핵심 증착 장비 국산화에 성공하자 현대전자, LG반도체 등으로 고객사를 늘려 나갔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창업 5년 만인 1999년 12월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당시 공모가는 34만원. 사상 최대치였다. 시장이 주성엔지니어링을 바라보는 기대치는 그만큼 높았다. 2000년 초 주성엔지니어링의 시가총액은 무려 3조원에 육박했다.
이 시기에 주성엔지니어링에는 큰 시련이 찾아왔다. 주요 고객사인 삼성전자와의 거래가 영구 중단된 것이다. 이유에 대해서는 삼성과 주성엔지니어링의 주장이 엇갈리지만 어찌됐건 주성은 가장 큰 고객사에 장비를 공급하지 못하는 회사가 됐다. 당시 해외 업체가 주성엔지니어링을 헐값에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황 대표는 회사를 포기하지 않고 `제2 창업`을 선언했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삼성전자를 제외한 반도체 업체를 신규 고객사로 유치하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디스플레이와 태양광 분야로 사업 포트폴리오도 확장해 나갔다. 청천벽력 같은 거래 중단 통보는 오히려 주성의 체질을 강력하게 바꾸는 계기로 작용했다.
주성엔지니어링은 2002년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를 시작으로 해외 디스플레이 기업에 증착 장비를 공급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실적도 회복세를 보였다.
그러나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거액의 비용을 들여 개발해 놓은 태양광 셀 생산 장비 사업이 시황 부진으로 고사 위기에 놓인 것이다. 적자는 계속 이어졌다.
황 대표는 승부수를 던졌다. 연구개발(R&D)에 더 많은 비용을 쏟았다. 매년 10% 안팎의 비용을 R&D에 투자한 주성이었다. 2012년에는 연간 매출에서 R&D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70%를 넘었다. 적자 상황에서 R&D에 이렇게 많은 비용을 투자할 수 있는 기업은 많지 않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현재 주성엔지니어링 매출과 이익을 책임지고 있는 반도체, 디스플레이용 원자층증착(ALD) 장비다. 주성엔지니어링은 1990년대부터 ALD 장비 기술을 계속 확보해왔다. 반도체 공정 미세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패널 봉지 공정 추가 등으로 과거에는 잘 쓰이지 않던 ALD 장비가 최근에는 핵심 장비로 자리를 잡았다. 황 대표는 이런 시기가 올 것임을 예상하고 적자 속에서도 R&D 비중을 높인 것이다. 주성 ALD 장비 성능은 세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대기업 종속형 중소기업은 오래 살아남기가 힘듭니다. 창조성과 독특한 노하우가 있어야 지속 가능한 경영이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최고`는 해도 `최초`는 못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최고는 힘든 날의 연속이고 최초는 성공을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곰곰이 씹어 볼 황 대표의 말이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