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은 담배를 10년 만에 다시 피게 됐습니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수시로 만나던 핀테크 은행 담당자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사업 제안 목적으로 찾아가겠다고 하니 메일로 보내라고만 합니다.”
“핀테크 사업을 위해 20년 다닌 은행을 그만두고 창업했습니다. 투자를 받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전에 다니던 은행의 후배조차 연락을 피합니다. 김영란법 여파로 금융사들과의 협력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일명 김영란법) 불똥이 핀테크 업계로 튀었다. 특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핀테크 사업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금융권 담당자들은 핀테크 업체와의 협력이 부정 청탁으로 비춰질까 우려, 만남을 꺼리고 있다.
3일 금융권과 핀테크 업계에 따르면 김영란법 시행 이후 수많은 핀테크 스타트업이 금융권과의 협력 사업에 애를 먹고 있다. 실무 담당자와의 만남 등 약속 잡기조차 너무 어려운 실정이다.
생체인증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한 스타트업 사장은 “기술 상용화를 마치고 은행과 협력을 모색하고 있는데 핀테크 사업 담당자들이 아예 만나길 꺼리고 있다”면서 “통상의 미팅 등도 김영란법의 세부 가이드라인이 나오지 않아 당분간 서면 사업계획서만 보내 달라고 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전직 지점장 출신인 또 다른 스타트업 사장은 “몇 개 카드사와 상용화 계약 직전까지 갔지만 김영란법 시행 이후 연락이 잘 되지 않고 있다”면서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금융사 후배들까지 연락을 피하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은행 등 금융권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법 시행이 됐지만 아직까지 주무 부처인 국민권익위원회의 지침이 명확하지 않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일단 협력사 미팅 등도 보수 형태로 운용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이런 분위기는 김영란법에서 정부가 위임한 권한이나 위탁한 업무를 수행하는 민간인을 `공무수행사인`으로 보고 법률 적용 대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은행은 정부의 위임·위탁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은행연합회가 최근 권익위에 김영란법 적용 대상인 정부 위임·위탁 업무 수행 대상자의 범위에 대한 유권 해석을 의뢰했지만 아직까지 회신은 받지 못했다.
한 은행 고위 관계자는 “핀테크 협력 사업이 김영란법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다”면서 “핀테크 사업뿐만 아니라 여러 기업과의 협력 사업은 일단 보수 방식으로 가자는 분위기가 있다”고 설명했다.
은행 내 핀테크센터 관계자도 “김영란법 시행으로 협력사와의 만남을 거절하는 일은 없다”면서도 “다만 핀테크사업 특성상 수시 미팅이 이뤄지는데 사람 만나는 자체를 자제하자는 분위기가 있다 보니 핀테크업체에서 그렇게 느낄 수 있다”고 해명했다.
일각에서는 김영란법 시행으로 기술력 있는 핀테크 기업만이 살아남는 옥석 가리기 효과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그동안 금융사와의 인맥, 지연 등을 활용해 협력 사업을 구축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기술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길재식 금융산업 전문기자 osolgi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