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이 큰 피자를 구워 팔려면 피자 반죽덩이 도를 얹는 판의 크기부터 키워야 한다. 화덕이나 오븐도 커져야 할 것이다. 밀가루나 각종 토핑 재료가 더 많이 쓰이기 때문에 재료 조달량도 사전에 늘려 놓아야 한다. 피자집 주인이 `더 큰 피자`를 원한다고 해서 큼지막한 피자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름이 커진 피자 끝 부분에 고구마나 치즈를 넣어 말려면 이 역시 재료 업체와의 사전 논의가 필요하다.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웨이퍼 원판 크기를 키우거나 회로 선폭을 좁히려면 생산 장비와 재료의 선행 개발이 필요하다. 웨이퍼 지름이 150㎜에서 200㎜로 전환되던 1990년대 초 산업계는 `웨이퍼 지름을 키우겠다`는 사전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탓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이런 문제 방지를 위해 1993년 국가반도체기술로드맵(NTRS)을 출범시켰다. 소자, 장비, 재료 업체가 모여 앞으로의 기술 전환 일정을 논의했다. 이 활동은 1998년에 일본, 한국, 대만, 유럽이 참여하면서 국제반도체기술로드맵(ITRS)으로 격상됐다. 각국의 중소 규모 장비 업체는 ITRS를 참고, 기술을 개발했다.
ITRS는 지난 5월 발간한 `ITRS 2.0` 보고서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끝냈다. 보고서는 2021년이 지나면 더 이상 선폭 축소가 힘들 것으로 결론을 냈다. 2년마다 트랜지스터 집적도가 두 배 확대된다는 무어의 이론은 이미 깨졌고, 5년 뒤에는 그나마의 발전도 어렵다는 것이 ITRS의 전망이다.
ITRS가 활동을 종료한 데에는 소자 업계와 장비, 재료 업계의 이해가 상충됐다는 점도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피자 크기를 키운 피자집 주인은 돈을 벌었는데 피자판, 오븐 업체는 그만큼 이익을 얻지 못했다는 의미다. 450㎜ 웨이퍼 도입 논의가 잠정 중단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권위 있는 기술 로드맵은 기업을 넘어 산업계 이익과 사회 발전을 지탱한다. ITRS가 활동을 멈췄지만 한국 반도체 산업계와 학계만이라도 머리를 맞대고 `포스트 ITRS`를 구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