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램 가격이 떨어지는 게 심상치 않습니다. 일본이 물량을 쏟아내고 있어요.”
삼성이 64K D램을 본격 수출하기 시작한 1984년. 메모리 시장에는 불황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었다. 결국 우려하던 `가격 대폭락` 사태가 벌어졌다. 1984년 4달러 수준이던 64K D램 가격은 폭락을 거듭해 1985년 중반에 30센트까지 떨어졌다. 당시 삼성의 64K D램 생산 원가는 1달러70센트였다. 제품을 하나 팔 때마다 1달러40센트를 손해 보는 상황이 펼쳐졌다.
가격 대폭락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공급이 수요를 크게 초과했기 때문이다. 공급 확대는 64K D램 개발비를 이미 회수한 일본 업체가 주도했다. 반도체 치킨게임의 역사는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다.
1984년까지만 하더라도 반도체 산업 주도국은 모토로라, 인텔, 마이크론 등이 포진해 있는 미국이었다. NEC, 히타치, 도시바, 미쓰비시를 앞세운 일본은 반도체 산업에서 미국을 앞지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저가 공세를 펼쳤다. 반도체 산업에 이제 막 진입하기 시작한 한국도 일찌감치 눌러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국 언론은 일본 반도체의 저가 공세를 `제2의 진주만 습격`이라고 표현했다. 일본 업체의 저가 공세로 미국 기업은 치명타를 받았다. 인텔은 그해 메모리 사업에서 철수했다.
미국은 가만있지 않았다. 1985년 6월 14일.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무역대표부(USTR)에 일본 반도체산업정책의 불공정성을 제소했다. 열흘 뒤인 6월 24일에는 마이크론이 NEC, 히타치, 미쓰비시, 도시바 등을 반덤핑 혐의로 제소했다. 이후에도 일본 업체에 대한 미국 반도체 업체의 제소는 이어졌다. 1986년 8월 미국의 계속된 보복관세에 일본은 무릎을 꿇게 된다. 일본 반도체 업체는 미국에 생산 원가를 공개하고 일본 내 미국 반도체 업체의 시장점유율을 20%까지 높이겠다는 굴욕의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한다. 통상 전문가들은 이 협정을 1854년 미국 매슈 페리 제독에 의한 `일본 개항` 이후 역사에 남을 만한 `힘의 통상협정`이라고 평가한다.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무역 분쟁은 결국 한국에 호재로 다가왔다. 그러나 과정은 힘들었다. 이 시기의 한국 기업, 특히 삼성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64K D램에 이어 256K D램을 개발했다는 성공의 자신감은 시황 악화로 까마득하게 잊혀 갔다. 미국 현지 법인에는 창고가 부족할 정도로 재고가 쌓였다. 기흥 공장에도 겹겹이 제품 박스가 늘어 갔다. 직원들은 동요했다. 경영진은 매일 아침 원가 절감에 최선을 다해 달라는 당부를 듣고 하루를 시작했다. 1986년까지 계속된 공급 과잉으로 반도체 사업의 누적 적자는 2000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이병철 삼성 회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 자리에 라인이 하나 더 서면 조화가 잘 맞을 텐데.”
이 회장은 기흥 공장을 방문할 때마다 3라인 건설을 재촉했다. 마침내 1987년 2월 3라인 착공 지시를 내린다.
임원들 사이에선 “회장을 말려야 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1라인 투자비 회수는 생각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2라인도 무리해서 지었는데 3라인에 3억4000만달러를 다시 투자한다는 것은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회장에게 올린 3라인 투자 관련 보고서에는 `안 된다`는 이유만 적힌다. 사실상의 지시 거부였다.
“도대체 왜 안 된다고 하느냐. 빨리 추진해야 한다. 우리에게 기회가 오고 있다.”
임원들은 건설 준비가 끝났다는 뻔한 거짓말을 하며 시간을 벌었다. 참다못한 이 회장은 “착공식에 참석하겠다”고 못을 박고 기흥 3라인 부지에 첫 삽을 꽂게 만든다. 그때가 1987년 8월 7일이다. 이 회장의 착공 지시가 있은 지 6개월이 지난 후였다.
모두가 이 회장의 결정을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반도체 사업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3라인 투자가 고비라고 생각했다. 3라인 건설이 시작되고 3개월 후 이 회장은 눈을 감았다. 일각에선 이 회장의 영면과 함께 3라인 건설이 중단될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다. 심지어 반도체 사업이 중단될 지 모른다는 말도 나왔다. 실제 당시 이건희 신임 회장에게 “반도체 사업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 임원도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그에게 호통을 치며 반도체 사업을 더 키우겠다고 말했다.
3라인 건설을 반대한 사람들은 모두가 땅을 치며 후회했다. 3라인 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1987년 말부터 반도체 경기가 급반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 간 반도체 통상 마찰로 일본 업계의 반도체 투자가 주춤했다. 인텔 등이 D램 사업에서 손을 뗐다. 공급 공백이 생긴 것이다. 반도체 가격은 급등했다. 3라인은 1988년 10월 완공됐다. 그동안 1, 2라인을 풀로 가동해도 주문량은 소화하지 못했다. 결국 3라인의 6개월 착공 지연은 기회 손실을 본 셈이다.
“1985년 겨울 2라인이 하루 1억원씩 까먹고 있었습니다. 임원들은 큰일났다고 하자 회장께선 돈 걱정 말고 3라인을 지으라고 하셨지요. 우리는 2라인을 너무 빨리 지었다고 걱정하는데 회장께선 3라인을 재촉했습니다. 만일 3라인을 빨리 지었다면 6개월 정도 앞당겨 1M D램을 양산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세계 반도체 업계는 지금과 또 다른 모양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릅니다.”
1M D램 개발을 주도한 박용의 박사의 회고다.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더욱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사실 많은 이가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 사업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부회장으로 있을 때 2라인 건설을 완료한 후 선행 투자에 따른 감가상각과 이익 회수율 데이터를 뽑아 오길 지시했다. 이건희 부회장은 이런 구체화한 자료를 가지고 이병철 회장을 설득했다. 3라인 투자는 결코 확률에 의존한 도박이 아니었고, 막연한 기대가 아니었다는 의미다.
1987년 12월 1일 이건희 회장의 취임과 함께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더 이상 방어에만 급급하지 말고 남보다 앞서 나갑시다. 한국이란 나라를 뛰어넘어 이제는 세계 수준의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납시다.”
이건희 회장이 선언한 `제2 창업`의 핵심은 공격 경영이었다.
1988년 한 해 동안 삼성반도체통신은 D램에서만 3200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그동안의 누적 적자를 모두 제하고도 1600억원을 이익으로 남긴 셈이다. 국내 경쟁사와 비교해도 이는 탁월한 성과였다. 불황에 대처하는 전략이 남달랐다는 의미다. 그해 현대전자는 반도체 부문에서 305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금성반도체는 이해에도 흑자를 달성하지 못했다. 금성반도체의 후신인 금성일렉트론의 흑자 달성 원년은 1992년이다. 금성은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1979년 이후 13년 동안 적자를 봤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