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50년]<4> 불모지에 뿌린 한국 반도체 산업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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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페어차일드 한국 공장. 여공들이 반도체를 조립하고 있다.

반도체는 진공관으로부터 시작됐다.

영국 과학자 존 플레밍은 1904년 유리공 속을 진공 상태로 만들고 필라멘트와 두 개의 금속판 전극을 넣은 2극 진공관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1900년대 초기 라디오나 텔레비전 수상기는 모두 이러한 형태의 진공관을 썼다.

진공관은 부피가 크고, 오래 쓰면 필라멘트가 타서 끊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최초 진공관 컴퓨터인 에니악은 빛과 열 때문에 모여든 나방으로 말미암아 회로가 합선되는 일이 잦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트랜지스터다. 1947년 겨울 미국 벨연구소에서 일하던 3명의 과학자 윌리엄 쇼클리, 존 바딘, 월터 브래튼이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를 개발했다. 트랜지스터는 진공 상태의 유리구도 뜨거운 열도 타서 없어지는 필라멘트도 없는 구조였다. 스위칭 속도는 진공관보다 20배나 빨랐다. 트랜지스터를 탑재한 라디오는 진공관을 사용한 제품보다 저렴했고, 크기가 작고 고장이 적었다. 트랜지스터는 빠른 속도로 진공관을 대체해 나가며 전자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트랜지스터 역시 단점을 드러냈다. 여러 기능을 구현하려면 다수의 트랜지스터를 연결해 사용해야 했다. 하나라도 연결이 불안정하면 기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 공학자이던 잭 킬비는 1958년 여러 트랜지스터를 한 개의 작은 칩에 구겨 넣는 방법을 개발하고 이를 집적회로(IC)라 이름 붙였다. IC 개발은 지구물리학 연구업체로 출발한 TI를 세계적 반도체 업체로 올려놨다. 세계 전자산업 발전은 트랜지스터와 IC로부터 시작했다고 말해도 과하지 않다. 트랜지스터를 고안한 3명의 과학자는 1956년, IC를 개발한 공학자 잭 킬비는 2000년에 각각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한국은 혼란기

1940~1960년대 미국에선 이처럼 세상을 바꾸는 혁신 발명 사례가 두루 나왔지만 한국은 일제강점기, 광복, 정부 수립, 한국전쟁, 군사정권 수립 등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961년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경제 성장을 지상 과제로 내걸었다. 집권 이듬해인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에 옮기며 사회간접자본(SOC)을 확충하는 한편 철강, 시멘트, 제당, 정유, 건설 등 공업 분야로 기업 진출을 적극 독려했다. 1963년 월남 파병을 계기로 기회를 맞은 중화학공업 특수는 해당 분야로 진출한 기업이 지금의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발판을 제공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전자산업은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이 끝날 때까지 한국 내 전자산업 분야 제조업체는 30개 미만에 그쳤다. 기초 전자부품과 라디오 등을 조립 생산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미국 사정은 달랐다. 트랜지스터에 IC까지 상용화되면서 통신, 산업, 군수 장비가 끊임없이 개발돼 나왔다. 부품 수요는 폭증했다. 미국 반도체 업계는 수요 폭발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면서도 더욱 효율 높은 원가 구조를 갖추기 위해 아시아 지역 내 공장 설립을 추진했다. 당시 미국 근로자의 임금 수준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고 있었다. 미국 기업은 핵심 기술이 투입되는 전 공정 공장은 자국에 두되 노동집약형 조립 작업은 해외에서 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들은 아시아 지역 여러 곳을 돌아보다가 `한국이 최적`이라는 결론을 내기에 이른다. 한국은 대만이나 홍콩보다 임금 수준이 더 낮았다. 반면에 교육 수준은 높아 숙련공으로 육성하는 것이 용이하다고 판단했다.

◇해외 반도체 기업, 한국 진출 봇물

외국계 반도체 기업의 국내 진출 첫 사례는 1965년 12월 3일 미국 코미가 설립한 고미전자산업이다. 고미전자산업은 내외 자본 75대 25 비율로 총 7만6000달러를 투자해 설립된 회사다.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를 조립 생산했다. 미국 코미에 재직하고 있던 한국인 이석우씨는 “임금 수준이 낮은 한국에서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를 조립 가공하면 원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회사를 설득했다. 그는 고미전자산업 초대 사장이 됐다. 고미전자산업의 반도체 조립 공장은 서울 마포 부근에 설치한 군용 천막 2개 동에서 시작됐다. 수십명의 여공들이 이 천막 안에 비닐을 깔고 트랜지스터를 조립했다.

고미전자산업 설립이 인가되고 약 1년 뒤인 1966년 11월 19일 한 신문에는 `처녀수출`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고미전자산업이 생산한 전자계산기용 트랜지스터 170만개가 미국으로 수출된다는 내용이었다.

1966년 8월 3일 정부는 외국인 투자에 대해 소득세, 법인세, 재산세, 취득세 부과를 5년 동안 면제하는 내용을 골자로 외자도입법을 제정한다. 이로 인해 해외 반도체 기업의 직접 투자가 크게 늘어났다.

페어차일드는 그해 214만5000달러를 직접 투자, 한국에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 조립 생산 공장을 짓는다. 합작이 아닌 직접 투자로 한국에 진출한 반도체 업체는 페어차일드가 처음이다. 비슷한 시기에 시그네틱스가 167만9000달러를 투자, 시그네틱스코리아를 설립했다. 1967년에는 미국 모토로라, IBM, 컨트롤데이터코리아가 투자 인가를 받아 낸다.

이 시기를 전후로 반도체 산업을 조명하는 보도가 부쩍 늘었다. “소형 트렁크에 200만~300만달러어치가 들어가는 반도체는 초고가의 고부가가치 제품”이라는 다소 호들갑스러운 보도도 눈에 띄었다. 모토로라를 예로 들면 반도체 공장을 준공하고 가동에 들어간 1968년에 총 1억4000만여개 부품이 한국에서 생산됐다. 인력도 그해 초 800명에서 연말 1300명으로 확대되는 등 `활황세`를 보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산 반도체의 조립은 사실상 한국에서 도맡았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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