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젊은층을 중심으로 유행처럼 번졌다. 말 그대로 우리나라가 지옥 같다는 의미다. 헬조선과 함께 비교 대상으로 늘 등장하는 게 북유럽이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 없는 이상적인 국가다.
이 중 덴마크는 우리에겐 복지천국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세금으로 월급 절반을 가져가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 정부가 국민을 책임진다. 한국에서 지출 부담이 가장 큰 교육과 의료가 무료다. 심지어 원격진료까지 앞섰다.
덴마크 오덴세는 안데르센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1년 내내 관광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에 덴마크에서는 단일 규모로 가장 큰 오덴세 대학병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오덴세 대학병원은 폐기종 환자를 원격진료로 돌본다. 원격진료는 국내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지만 덴마크에서는 많은 환자가 혜택을 받고 있다. 물론 무료다.
오덴세 역에서 차로 10분가량 달리면 고풍스런 덴마크식 건축물 사이로 현대식 건물이 눈에 띈다. 오덴세 대학병원에서 운영하는 페이션트 호텔이다. 우리말로는 환자를 위한 호텔이다. 하루에서 이틀 정도 입원치료가 필요한 환자나 보호자가 묵을 수 있다. 병실이 부족한 덴마크에서는 위급 상황이 아니면 평균 이틀 정도만 입원한다.
2층은 폐질환 환자 병동이다.
안내를 맡은 죄렌 묄러 파마르-질레만 웰페어테크(Welfare Tech) 자문위원이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한 폐기종 환자에게 우선 적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웰페어테크는 헬스케어·홈케어·사회복지 분야 혁신·사업 개발 등을 총괄하는 클러스터다.
원격진료실 문을 열자 벤트 그뢴 간호사가 반갑게 맞이했다. 딱 봐도 수간호사급이다.
물어보니 경력이 20년이 넘었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PC 사용이 능숙하다. 원격진료에 필요한 의료정보 사용능력을 마스터 수준까지 취득했다고 그뢴 간호사가 알려줬다.
환자 상태를 간호사가 1차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해당 분야 경험과 지식이 중요하다. 신참 간호사에게 원격진료를 맡기지는 않는다.
원격 진료실은 생각보다 단출했다. 모니터 3대와 PC 1대가 전부다. 3대 중 원격진료에 필요한 모니터는 2대다. 왼쪽 모니터로 해당 환자의 정보를 보면서 가운데 모니터로 대화한다.
그뢴 간호사는 원격진료 전담이다. 일주일에 37시간을 이곳에서 근무한다. 관리 환자는 매번 달라진다. 원격진료 기간이 2주 정도이기 때문이다. 원격진료기기는 치료 후 처방처럼 사후 조치 개념이라고 그뢴 간호사는 설명했다.
마침 환자와 인터뷰 시간이다. 64세 리스 앤더슨 할머니다. 약 2주 전 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 호흡을 하지 못할 정도로 위독했다. 병명은 폐기종. 치료 후 지속적인 관찰을 위해 원격진료 시스템을 집에 설치했다.
원격진료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영상통화하는 수준이다. 굳이 병원에 올 필요가 없는 환자를 돌보는 데 제격이다.
그뢴 간호사는 “PC라면 노인들이 거부감을 갖기 때문에 `브리프 케이스(서류 가방)`로 표현한다”며 “전원을 켜고 버튼만 한 번 누르면 바로 영상통화가 가능해 노인도 쉽게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진료는 근황을 묻는 것부터 시작한다. 기분이 어떤지, 아침에는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등이다. 그뢴 간호사는 대화로 환자 식단과 투약 여부, 몸 상태 등을 파악한다.
원격진료로 폐 기능도 점검한다.
앤더슨 할머니는 능숙하게 폐 기능 진단기기를 검지 끝에 끼우고 그뢴 간호사 지시에 따라 숨을 크게 내뱉었다. 이는 실시간으로 진료실 왼쪽 모니터에 그래프 형태로 보여진다. 할머니 폐 기능은 정상인의 35% 수준이다. 해당 정보는 그뢴 간호사가 작성한 보고서와 함께 주치의와 전문의에게 전달된다.
앤더슨 할머니는 “간호사와 매일 얘기하는 게 중요하다”며 “상태를 매일 확인하기 때문에 안정감이 든다”고 말했다.
스스로 측정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없었다. 설치할 때 충분히 설명을 듣기도 하지만 영상통화가 있어 하루 이틀이면 능숙해진다고 할머니는 답했다.
앤더슨 할머니가 관리를 잘 한 덕분에 원격진료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해 이날 회수하기로 했다.
원격진료 시스템은 트레포 케어에서 개발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2006년에 이미 시작했다.
사실 원격진료는 환자 안전과 서비스 질을 높이려는 의도도 있지만 덴마크 정부 복지 부담을 줄이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모든 의료 비용이 무료다보니 관련 재정 지출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외르겐 톰슨 트레포 케어 운영 매니저는 “불필요한 입원을 막기 위해 새로 짓는 병원의 침상을 줄일 정도”라고 설명했다.
원격진료는 환자가 병원으로 오는 시간과 비용을 아끼는 한편 왕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고 위험도 줄였다. 환자를 집에서 돌본다는 `Patient @ home`이 슬로건이다.
재활치료는 모니터로 간단한 동작을 따라 할 수 있게 했다. 전문 강사가 원격진료 시스템을 통해 실시간 알려준다. 같은 시간 운동하는 환자들을 한 화면에서 만날 수도 있다. 혼자 집에 있다는 외로움도 해결했다. 집 근처에 사는 환자와는 따로 만나기도 한다.
트레포 케어는 이를 위해 모니터링센터와 콜센터를 갖췄다. 최근에는 태블릿PC나 스마트폰으로도 쓸 수 있게 개선했다. 윈도나 iOS, 안드로이드 모두 지원된다.
혈압이나 심박수와 같은 의료 정보는 암호화해 해당 병원 서버로 보내진다. 개인정보가 샐 염려는 없다. 덴마크 정부 차원에서 법으로 강화해 놓았다. 토종 기업인 트레포 케어가 덴마크 원격진료 시장을 선도하는 이유다.
톰슨 트레포 케어 운영 매니저는 “IT 개발로 구글이나 애플, 삼성도 헬스케어에 뛰어들고 있지만 트레포 케어는 원격진료를 선점한 데다 작은 시장에 집중해왔다”며 “지금까지 쌓은 노하우로 만든 사용자 인터페이스(UI), 사용자 환경(UX)이 강점”이라고 말했다.
유창선 성장기업부(구로/성수/인천) 기자 yuda@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