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과 정부가 공동으로 자금을 대고 대학·연구소가 연구개발(R&D)을 수행하는 ‘미래 반도체소자 원천기술개발사업’이 가시적 성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신규 사업 추진은 어렵다. 기업은 돈을 낼 의향이 있으나 정부가 돈이 없다. 올해 반도체 분야 R&D 예산이 단 한 푼도 없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 사업 잠재력과 성과 등을 보고받은 후 올해 신규 과제를 만들기 위해 예산 확보에 매진하는 것으로 전해졌으나 상황은 어렵다. 당장 이 사업 내 과제 관리·평가를 맡는 산업기술평가관리원 반도체 공정장비 PD는 3월 중 공석이 된다. 신규 충원 계획이 없다.
◇기업이 R&D 후원자로 변신
미래 반도체소자 원천기술개발사업은 미국 반도체연구협회(SRC:Semiconductor Research Corporation) 모델을 본 딴 것이다. 미국 반도체 업계는 매년 SRC에 1000억원 규모 R&D 자금을 출자해 대학 등이 원천기술을 개발하게 한다. 이로써 인력과 산업 생태계를 육성하는 것이다. 기업이 연구 방향을 정하고 관리하는 만큼 R&D 결과물이 상용화로 연결되지 못해 사장될 우려도 적다. 미래 반도체소자 원천기술개발사업에서도 이 같은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이 사업은 2013년 6월부터 올해로 3년차를 맞는다. 29개 기관(대학 24개, 연구소 5개)이 참여해 △CMOS(Complementary Metal-Oxide Semiconductor) 확장 △차세대 메모리 △BEOL(Back End Of Line) 기술 △차세대 반도체 프로세스Ⅰ, Ⅱ △계측·테스트 기술 △회로&시뮬레이션 기술 분야 37개 미래 반도체 소자 R&D 과제를 수행 중이다. 국내 소자 대기업(삼성전자, SK하이닉스)과 해외 반도체장비 업체(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스, ASML, 램리서치, 도쿄일렉트론), 한국 반도체 장비 업체(원익IPS, 케이씨텍, 피에스케이, 테스, 엑시콘, 오로스, 넥스틴)가 정부와 함께 필요 과제당 연구비 절반을 댔다. 과제당 연구비는 연간 1억~2억원 수준이다. 연구 수행 기간은 5년이다.
이민영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본부장은 “그간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던 반도체 소자, 장비 업체가 R&D 생태계 후원자로 변신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기업이 5년 이후 필요로 하는 원천기술을 학교·연구소가 개발하도록 사업비를 지원하고, 과제 점검도 직접할 수 있게 만들어 철저한 책임·성과 중심 사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타 산업서도 이 모델을 적극 차용한다. 협회 관계자는 “2014년 디스플레이 업계도 반도체 쪽 모델을 그대로 차용해 공동 출자 기반 R&D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자동차 쪽에서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전문 인력 양성서 최대 성과
인력 양성서 가장 큰 성과를 봤다. 손현철 미래 반도체소자 원천기술개발사업단장(연세대 공과대학 신소재공학 교수)은 “2차연도까지 R&D 과제에 참여한 누적 학생 인력은 1357명인데 이 가운데 238명이 취업했으며 94%는 반도체 분야에 종사한다”고 설명했다. 과제비를 댄 기업에 취업한 학생은 90명에 이른다. 과제 수행으로 출원된 특허도 115건이나 된다. 국제학술지에 게재된 SCI 논문은 218편이다. 손 교수는 “출원 특허 가운데 기업에 필요한 특허는 판매하는 절차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 관계자는 “기업과 학교, 연구기관이 한 방향으로 R&D에 매진하고 있어 조만간 성과물을 현업에 적용하면 사업에 실질적 보탬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염근영 성균관대학교 교수는 “기업과 함께 R&D를 하기에 방향성 측면에서 어긋나는 일이 없고, 기업은 과제에 참여한 학생을 데려다가 실무에 곧바로 투입할 수 있어 서로 좋다”고 말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