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SW)가 산업혁신을 이끌고 있다. 농축산 등 전통산업을 고부가 가치화하고 자동차·조선·국방·항공 등 주력 산업 고도화 중심에 SW가 있다. 2012년 기준 글로벌 SW시장은 1조3000억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자동차의 1.5배, 반도체의 4배, 휴대폰·반도체·자동차 시장을 합한 규모와 맞먹는 대규모 시장을 형성했다.
세계 SW산업의 비약적 성장 배경에는 클라우드·빅데이터·사물인터넷(IoT)·인공지능·임베디드SW 등 핵심기술이 있다. 우리나라는 핵심기술 확보전에서 한발 뒤처져 있다.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에 따르면 국내 SW기술은 미국 대비 운용체계(OS)가 3.27년, 빅데이터 2.63년, 기초기술과 최신 기술 전반에 걸쳐 2년 이상 격차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술 수준도 미국 대비 평균 73.5%다.
산업적 측면에서도 우리나라 전체 SW업체 중 45%가 매출액 10억원 미만 중소 업체로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13년 시장조사업체인 IDC 자료에 의하면 패키지 SW 분야 세계 500대 기업 중 국내 기업은 4개에 불과해 글로벌 경쟁력 또한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디서부터 이런 큰 차이가 벌어진 것일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 것일까.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SW강국’ 미국을 살필 필요가 있다. 빠른 속도로 바뀌는 IT산업에서 미국은 SW패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수십년간 그 지위를 잃지 않고 있다. 미국의 성공 비결은 국내 SW산업에 해법이 될 수 있다.
◇SW산업 메카 미국
성공한 SW기업은 모두 미국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마이크로소프트, IBM, 오라클, 구글, 애플 등 유수 기업이 미국에 포진해 있다.
미국은 세계 SW산업 ‘메카’로 불린다. 운용체계(OS), 데이터베이스, 보안, 그래픽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며 글로벌 표준을 이끈다. 클라우드, 빅데이터, 오픈소스 등 새로운 분야를 주도한다.
SW 모든 분야에서 시장을 주도하는 미국의 힘은 통계에서 잘 드러난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가트너가 세계 소프트웨어 기업 매출 순위를 집계한 결과 상위 10개 기업 중 9개가 미국 기업으로 나타났다.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IBM이 나란히 1, 2, 3위를 차지했다. 독일 기업용 SW 전문 기업 SAP가 4위에 랭크돼 미국 외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상위 톱10 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이 외 세계적 보안 회사인 시만텍, 데이터 관리 및 저장 전문 업체 EMC, 가상화 분야 1위 VM웨어 등이 이름을 올려 미국 SW 기업의 저력을 보였다.
미국 SW 경쟁력은 국내 연구기관의 분석에서도 확인된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미국은 세계 패키지 SW 시장 점유율 1위(2012년 기준)다. 세계 패키지 SW 시장 81%를 점유하고 있는 주요 350개 업체 가운데 216개 업체가 미국 기업이다. 총매출은 2239억달러로, 세계 패키지 SW시장에서 65.35%를 차지한다. 2위 독일(6.48%), 3위 일본(2.56%)를 압도하는 수치다.
IT서비스 시장에서도 미국은 독주했다. 세계 IT서비스 시장 72.3%를 점유하고 있는 주요 338개 업체를 조사한 결과, 미국 68개 기업이 총 3421억달러 매출(2012년 기준)을 거둬 37.8% 점유율로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 이 역시 각각 2, 3위인 일본(11.7%), 인도(4.9%)를 멀찌감치 따돌리는 규모다.
우리나라는 IT서비스 시장에서 세계 상위 기업 중 12개 기업이 활동, 약 200억달러 매출규모로 세계 7위 수준이나, 매출 총액 기준 점유율이 1.3%로 매우 낮았다.
매출 상위 100대 SW기업 순위에서도 미국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세계 패키지 SW시장에서 매출기준 100위권 기업 수는 국가별로 미국이 70개로 가장 많았다. 미국에 이어 독일(6), 영국(5), 일본(4), 캐나다(2), 프랑스(2), 네덜란드(2), 러시아(2) 등이었다. 상위 100대 기업에 우리나라 기업은 포함되지 않았다.
IT서비스 시장에서도 상위 100위권에는 미국 기업이 가장 많다. 미국(44), 일본(17), 인도(8), 프랑스(6), 영국(6), 독일(4), 한국(3), 스페인(2), 캐나다(2), 스위스(1) 등이다.
우리나라 기업 중에는 삼성SDS(33위), LG CNS(48위), SK C&C(74위)가 이름을 올렸지만 글로벌 기업과 격차가 크다.
◇미국 SW산업 성공 배경은
미국에서 수많은 SW기업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인재, 정책, 자본 등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미국은 정부 주도의 산업 육성이 아닌 민간 중심 SW 발전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기초가 탄탄하다. 특히 민간 중심의 발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문화가 꼽힌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에 위치한 기업용 스토리지 업체인 ‘퓨어스토리지’. 2009년 설립한 이 회사는 기관투자자들로부터 선기업공개(Pre-IPO) 자금으로 1억5000만달러를 투자 받았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중에서도 1회 투자금으로는 최고 수준이다. 데이터를 하드디스크 대비 6분의 1 수준으로 줄여 저장하는 중복제거 및 압축 기술을 인정받았다.
퓨어스토리지의 이런 차별화된 기술은 기업 문화에서 나왔다. 마케팅·구매부서 사람들도 언제든지 엔지니어링부서에 와서 제품 아이디어를 낸다.
설립자이자 최고기술책임자(CTO)인 존 코즈는 “내부 미팅은 빨리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에게 방해가 되더라도 많이 모여 논의하는 게 더 생산적이다. 이것이 우리만의 ‘오픈 컬처’”라고 소개했다.
퓨어스토리지 본사엔 최고경영자(CEO)와 CTO를 위한 공간이 없다. 사무실 중간, 다른 직원과 맞붙은 책상 하나가 전부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직원들이 한데 뭉쳐 융합된 힘을 내기 위해서다.
존 코즈 CTO는 “지금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전에 몰랐던 사이”라며 “‘에벌루션 DNA’ 즉, 다른 문화가 더 많은 창의력을 창출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 SW 기업들은 창의적 인재를 중시한다. 정답을 찾기보다 문제 해결 능력을 요구한다. 직원 채용 때부터 프로그래밍 능력을 테스트하기보다 지원자의 문제 인식 및 해결 능력 등을 우선 검증하는 식이다.
실제로 구글은 직원 채용 시 ‘자연대수 e를 풀어서 쓸 때 처음 발견되는 10자리의 소수.com’이라는 언뜻 보기에 이해하기 힘든 광고를 낸 적 있다. ‘구글’이 보이지 않는 다소 황당한 수수께끼였지만 정답은 특정 웹사이트 주소였고 이를 풀어낸 사람만이 이 광고가 구글의 채용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승훈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구글은 일반인이 무심코 지나칠 만한 상황에서 호기심을 가지고 문제를 인식하며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인재를 발견하기 위해 이러한 시도를 했던 것”이라며 “주어진 문제의 답을 빨리 찾는 것을 중시하는 국내 기업과 달리 문제 해결 과정에서 독창성과 창의성을 평가하는 실리콘밸리 기업이 다른 점”이라고 말했다.
창의적 문화만으로 실리콘밸리, 나아가 미국 SW산업이 발전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정책적 지원과 인재 양성, 투자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결과다.
실리콘밸리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SW지역으로 통하지만 오히려 하드웨어(HW) 중심의 산업이 태동하던 곳이었다. 초기 실리콘밸리는 미국 국방부에서 연구개발 과제를 의뢰 받아 성공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국방부 개발 과제는 실리콘밸리가 스탠퍼드나 UC버클리로부터 젊은 과학 인재를 유치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셈이었다.
무엇보다 인재 양성이 뒷받침됐다. 스탠퍼드대가 큰 역할을 했다. 1940~1960년대까지 스탠퍼드대 학장을 지낸 프레드릭 터만은 2차 대전 후 캘리포니아만 지역 인재들이 동부 해안 쪽 대기업으로 유출되는 것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학교와 인접한 지역의 여유 토지를 이용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모색했다. 이에 동부 큰 기업 지사를 스탠퍼드 인근으로 유치하고, 스탠퍼드 우수 인재를 기업에 공급했다. 조기 채용된 학생들의 지속적인 교육을 위한 산학 협력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우수 인재가 사회에 진출하면서 기술 혁신을 이끌었고 실리콘밸리를 HW에서 SW 중심으로 바꿔 놓았다. 실리콘밸리 고용 인력은 미국 전체 SW 인력 10%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있다.
정부기관의 정책적 지원도 빼놓을 수 없다. 벤처캐피털 업체들이 위험을 감당할 수 있도록 유한 책임 파트너십을 허용하는 규제 등의 적절한 조화가 이뤄졌다. 적극적인 주식 시장의 이용, 기업 투명성 제고를 위한 재무정보공개, 정치적 안정 등과 같은 비즈니스 환경도 한몫했다. 벤처투자자들이 감수해야 할 투자 위험을 완화시켰던 것이다.
문제를 새롭게 발견하고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채용 과정, 끊임 없이 혁신적인 시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가는 문화 그리고 이를 구현하는 시스템의 조화가 미국을 SW 강국으로 만드는 원천으로 요약된다.
<2014년 세계 SW 기업 매출 및 시장 점유율 (단위:100만달러) / 자료:가트너 2015년 5월>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