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단맛: 기억과 추억
엄마는 어린 내 손을 잡고 재래시장에 가곤 했다. 재래시장은 엄마에게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어루만져주는 유일한 장소였고 어린 내게도 언제나 가슴 설레게 하는 나들이 장소였다. 엄마 손을 꼭 잡고 시장에 들어서면 골목 양쪽으로 좁게 늘어선 생선 가게, 정육점, 두부 가게, 과일 가게가 우리를 반겼다. 나이는 어렸지만 엄마와 함께하는 시장 나들이가 보는 재미로만 끝나지 않고, 곧 먹는 즐거움이 따라올 것임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시장 골목 특유의 냄새와 서서 먹는 불편함 따위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늘 복닥거리는 시장 통에서 엄마는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나를 의자에 앉혔다. 돈을 치르기 훨씬 전부터 내 입으로 수수부꾸미, 떡볶이, 어묵, 순대가 끊임없이 직행했다. 음식을 입에 넣고 마냥 좋아하는 철없는 모습을 보며 엄마는 시집살이의 애환을 달랬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어서도 재래시장의 추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재래시장을 냄새로 만나고 색감으로 추억한다. 외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신기하게도 재래시장의 분위기는 세계 어느 곳을 가나 비슷하다.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사람을 들뜨게 하고, 마음까지 넉넉하게 풀어준다. 타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재래시장, 메르카토는 시간, 공간, 문화의 벽을 넘어 린 시절의 추억처럼 다가왔다. 큰 건물 안에 자리 잡은 재래시장에서 처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끝없이 길게 이어진 사람들의 줄이었다. 무슨 가게일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우리도 그 줄의 맨 뒤에 섰다. 가게 안에서는 영화배우처럼 생긴 남자가 해산물을 튀기고 있었다. 오징어, 새우, 문어 등 바다에서 갓 잡은 싱싱한 것들이 뿜어내는 튀김 냄새가 우리를 설레게 했다. 드디어 우리 차례. 한입 넣으니 낯선 곳에서 긴장됐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무장 해제되었다.
메르카토는 우리나라의 5일장이나 7일장처럼 야외에서도 열린다. 상인들이 트럭을 개조한 좌판을 펼쳐놓고 과일, 채소, 수제 소시지, 지역 특산품 등을 판다. 이탈리아 파르마 근처의 야외 시장에서는 그곳 사람들의 삶을 보다 가까이 느낄 수 있었는데 치즈의 명산지답게 형형색색의 치즈를 원하는 만큼 잘라 팔았다. 우리나라 재래시장에서 어리굴젓, 조개젓, 오징어젓을 한 국자씩 파는 모습과 비슷했다.
소금물에 담근 올리브 열매 한 봉지를 사가지고 와서 앉은자리에서 와인과 함께 다 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 맛있었다. 재래시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다양한 물건들은 신비스러운 색상을 펼쳐낸다.
유명 화가의 그림에서도, 팬톤 컬러칩에서도 찾기 어려운 색의 향연이다. 재래시장이라고 하면 색감과 디자인이 촌스러울 것이라는 편견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그 어떤 현대적 공간보다 더 세련된 컬러의 조화를 보여준다.
오래된 시장에는 세월의 흔적이 쌓여 저절로 디자인의 요소를 갖추게 된 물건들이 모여 있기 마련이다. 아무렇게나 주렁주렁 걸어놓은 소시지, 두서없이 쌓여 있는 치즈, 셀 수 없이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빵들, 옹기종기 모아놓은 형형색색의 과일.... 이 모든 것들이 원초적인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고재선
그래픽 디자이너로 국내외에서 활동해 왔으며 식문화에 대한 이론과 실제에 밝다. 음식을 맛 이전에 다양한 시각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글과 시각적 요소의 통합을 위해 직접 이 책의 북 디자인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