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화학산업의 연구개발(R&D)을 이끌어온 한국화학연구원은 최근 관련 산업 상황을 우려 섞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중동이나 중국 등 신흥국은 투자를 늘리고 기술수준이 올라가며 자급률이 상승하는 등 외부환경은 급변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 석유화학 산업구조는 범용 제품 중심이어서 성장이 정체됐고 정밀화학 분야는 원천기술 부족으로 무역적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화학연은 이에 대한 탈출구를 정밀화학산업 원천기술 개발에서 찾고 있다. 중장기 계획도 세워 놨다. 제2, 제3의 위기가 지속적으로 반복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케미(CHEMI) 2020’ 중장기 전략을 기반으로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규호 원장은 “지속가능 사회를 실현하는 화학전문 연구기관을 비전으로 제시했다”며 “인재경영을 바탕으로 세계 5대 화학강국 실현에 기여하는 것이 기관목표”라고 설명했다.
세계일류 수준의 연구개발 역량을 갖춘 글로벌 톱 그룹과 글로벌 히든챔피언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화학연은 핵심연구그룹과 글로벌 인재 확보, 연구몰입환경 조성, 산학연 협력 허브 역할 수행, 화학산업 정책 싱크탱크 및 국제협력 등을 주요 전략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최근 석유화학산업이 위기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화학산업은 1960년 비료공업에서 시작해 중화학공업, 정밀화학공업, 의료 및 전자재료 분야에 이르기까지 국가 경제 발전에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생산규모는 2013년 기준 400조원에 달한다. 국내 총생산의 26.9%, 국내 총 무역규모의 13.4%나 된다.
이런 화학산업 성장에는 석유화학산업이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성장세가 멈췄다. 중국의 기술 등이 상당 부분 올라왔다. 외부 환경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변해야 산다.
화학연구원은 최근 화학산업 위기의 본질이 혁신기술과 소재 부족, 자원전략 부재, 강소 중소기업 빈약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정밀화학산업을 진단하고 현재 수립 중인 발전 전략에 대해 말해 달라.
▲정밀화학 산업은 관련 산업의 품질고급화와 신상품 개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산업이다. 수요 및 응용범위가 무한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국내 정밀화학산업이 범용제품 생산에 머물러 있는 구조라는 것이다. 또 석유화학 원료는 저가로 수출되고 정밀화학 핵심제품인 중간체 및 원제는 수입에 의존하는 등 전후방산업의 연계가 취약한 생산 구조다.
정밀화학산업의 대표적인 특징인 고부가가치, 지식기반형 산업이라는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산업통상자원부와 공동으로 ‘정밀화학산업 발전전략’을 수립 중이다. 상반기에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 전략이 나오면 우리가 집중 육성해야 할 제품군이 발굴될 것이고 맞춤형 지원대책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창조경제 실현을 위한 중소, 중견기업 육성 정책이 있나.
▲‘KRICT 디딤돌 사업’이 대표적이다. 중소기업이 성장하는 디딤돌 역할을 화학연구원이 수행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소기업을 풀로 지원할 건물을 건립한다. 내년 말 이 건물이 완공되면 오는 2017년까지 총 35개 기업이 이곳에 입주하게 될 것이다.
이 건물은 개방형으로 지어 카페 등을 만들 것이다.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다. 또 기술이전 등 기관의 중소기업 지원 기능이 모두 이곳으로 옮겨간다. 연구장비도 같이 이용하고 공동 R&D는 물론이고 경영까지 지원하게 될 것이다.
현재 디딤돌 사업 차원에서 5개 기업이 연구원에 입주해 있다. 올해는 3개 정도를 입주시킬 계획이다.
-‘인재경영’을 선언했다. 우수인력 확보방안은 무엇인가.
▲연구기관의 연구경쟁력은 얼마나 우수한 핵심 연구자를 확보하는지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 국내외 리더급 연구인력과 신진 연구인력을 적극 유치하고, 우수 연구인력 확보를 위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것이다.
내년까지 2명의 노벨수상자급 스타연구자 유치 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할 예정이다. 또 전문연구 역량 향상을 위한 국내외 연수 지원을 확대할 것이다.
올해 처음 정년이 65세인 우수연구원을 뽑았다. 이 같은 정년연장제도와 전문위원 제도를 지속 시행할 것이다. 안정적인 연구환경이 조성돼야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연구연가 프로그램 등도 유연하게 운영할 것이다.
-선진경영체제를 도입한다고 신년사에서 밝혔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크게 네 가지 추진전략이 있다.
우선 대형국책사업 확보, 연구자 중심의 자율 혁신제도 활성화 등을 통해 연구 중심의 경영을 추진할 것이다. 또 개인평가제도를 차별화하고 성과 중심의 평가를 추진한다. 현행 상대평가 시스템을 가능하면 절대평가제로 바꿔나갈 것이다. 현재 TF를 구성해 검토 중이다.
연구부서도 논문이나 특허, 사업화 등 잘하는 게 따로 각각 있다. 세분화해서 서로 억울한 게 없도록 할 것이다.
또 산업계 기술이전 및 창업 지원 시스템 운영, 산학연 인력 교류 활성화를 통해 연구인력 유동성을 확대할 것이다. 나아가 출연연 대형 융·복합 사업 추진, 산학연 협력 연구기획 강화, 연구 지원·행정 부서의 직능 전문화 및 운영 효율화를 꾀할 것이다.
-기술이전 및 지식재산권 관리 효율화 방안에 대해 설명해 달라.
▲외부기관과의 전략적 협력과 연구소기업, 연구원 창업 기업 설립을 통해 기술이전 수익모델을 다변화할 것이다.
연구기획부터 관리 및 성과창출·확산·사업화까지의 R&D를 전 주기 통합관리하고 유망기술 사업화와 중소기업 맞춤형 기술이전을 동시에 추진할 예정이다. 기업과 매칭해 기술료 수익으로 전환 가능한 공동 연구과제를 기획하는 것도 기술이전 활성화의 좋은 사례가 될 것으로 본다.
출연연의 주요 당면과제 중 하나인 장롱특허를 최소화하기 위해 지식재산권 관리를 효율화할 예정이다. 기술을 필요로 하는 기업에는 경상기술료 위주로 계약해 중소기업의 재정 부담을 최소화한다.
사실 화학연은 지난해 계약조건에 따라 공개하진 않았지만 글로벌 제약사에 ‘항바이러스 치료제 개발을 위한 후보물질’을 이전하는 큰 건을 터뜨렸다. 화학연은 이 기술이전과 관련해 올해 벨기에 KUL과 협동연구를 기반으로 이 글로벌 제약사와는 공동연구를 진행한다.
-출연연을 조선시대 집현전으로 보고 계신데 이유가 있는지.
▲집현전은 세종시대 국책연구기관이다. 어질고 현명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뜻이다.
지난해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세종시로 이전했다. 출연연은 다양한 연구자들이 모여 있는 국책연구기관이다. 그렇게 보면 출연연이 이 시대 집현전인 셈이다.
출연연은 과학기술과 정책전략을 통해 세종시대의 집현전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창조경제 패러다임이 성공할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하는 곳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화학연을 포함한 출연연은 창조경제시대의 집현전이다. 그만큼 시대적 사명이 무겁다고 본다.
정부는 세종대왕이 집현전에 그랬던 것처럼 연구 자율성을 부여해 마음껏 연구에 몰입하고 시대적 소명을 다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올해 주요 R&D 과제는?
올해 화학연구원은 국가 현안을 해결하는 융합연구를 수행할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주도의 ‘화학공정(CCP) 융합연구단’에 연구역량을 모을 계획이다.
이 융합연구단은 화학연이 주관하고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과 한국기계연구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협력한다. 향후 6년간 매년 100억원씩 600억원을 투입해 핵심 기초 화학원료를 경제적〃친환경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대단위 패키지 공정을 상용화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최근 화학연은 CCP융합연구단을 개소하고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주요 산학연 연구개발 주체의 역량을 전 방위적으로 결집시킬 계획이다. 투입 연구원만 모두 100여명이나 된다.
주요 협력 연구기관인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은 석탄 및 중질유를 고도화하기 위한 정제 공정 기술을 개발한다. 또 한국기계연구원은 반응열 제어기술 개발을 맡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은 복합막 제조 및 분리모듈 기술을 개발한다.
이를 통해 대형 융합 플랜트 핵심기술인 석유화학 공정설계, 기초원료 생산, 중질유 성능 향상 등의 기술을 개발할 계획이다.
화학연은 이 사업단을 통해 개발 기술이 상용화되면 16조원가량의 플랜트 수출과 기술국산화에 따른 6조원의 수입대체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또 일자리는 약 3만개, 이산화탄소 저감량은 2550만톤에 이를 전망이다.
이와 함께 화학연구원은 올해 친환경 화학공정, 고부가가치 녹색 화학소재, 의약 바이오 연구분야에서 국가 화학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원천기술 연구개발에 올인한다.
또 국정과제의 핵심의제인 ‘화학물질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구현하는 예방 대응기술 개발’을 추진한다. 이 기술 개발에는 정부 출연연구기관 14곳이 참여한다.
온실가스의 저감 및 자원화 연구와 탄소산업 생태계 조성을 위한 협력 연구 등 대내외 사회 이슈 해결형 산학연 협력 연구도 지속 추진한다.
또 울산에는 바이오화학실용화센터를 건립한다. 이 센터는 바이오매스 전처리·당 전환, 발효공정, 제조·가공에 이르는 친환경 바이오화학 기술 개발과 실용화를 위한 핵심거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바이오화학산업은 바이오매스를 이용해 바이오슈가와 바이오플라스틱용 단량체 등 산업용 원료를 만들어내는 미래산업이다. 대부분의 석유화학 제품을 대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규호 한국화학연구원장은?
과학기술인들의 입장에서 정부 등에 과학기술 정책을 제안하는 역할을 꾸준히 해왔다. 요즘 이차전지로 주목받고 있는 분리막 전문가지만 과학기술중심 국정운영을 위한 방안 등 과기정책을 꾸준히 연구하고 제안했다.
1952년생이다.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온 ‘KS파’다. 석사학위는 1977년 KAIST에서 받았다. 같은 해 한국화학연구원에 들어갔다.
1980년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어렵게 들어간 화학연구원에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화학 및 재료공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1984년부터 1987년까지 미국 신시내티 대학 분리막연구센터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화학연구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대개는 귀국한 뒤 대학으로 빠져 나가는데 특이한 사례다. 선임연구원을 시작으로 분리소재연구실장과 분리막다기능소재연구센터장, 응용화학연구부장, 연구위원,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대외활동으로는 한국막학회 회장과 한국고분자학회 부회장, 한국공업화학회 부회장, 국제순수 및 응용화학연맹(IUPAC)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또 과학기술인 견해를 대변하던 출연연연구발전협의회장과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대표를 지내고 현재 대덕클럽 회장과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교수, 한국화학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1999년 대통령 표창과 2013년 과학기술훈장 도약장을 수상했다.
성격은 온유한 편이다. 유연한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십을 보유하고 있다. 모난 성격이 아니어서, 연구원들을 되레 잘 규합하는 데 유리하다는 평이다.
대전=박희범기자 hbpark@etnews.com
대전=박희범기자 hb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