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보이지 않는 무역장벽…`기술규제전쟁`

Photo Image

세계 각국이 자국 산업 보호수단의 하나로 기술규제를 강화하면서 보이지 않는 무역장벽을 둘러싼 소리없는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해외 주요 경제권과 자유무역협정(FTA)을 확대하면서 관세장벽을 낮추는데 성공했지만 기술규제를 중심으로 한 해외 비관세장벽은 여전히 높다는 지적이다. 효과적인 기술규제 대응책 마련이 올해 우리 수출의 또다른 과제로 떠올랐다.

최근 미국·일본·호주·캐나다·멕시코 등 12개국이 참여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한국을 포함해 아세안(ASEAN) 10개국과 중국·일본·인도 등 16개국이 참여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등 이른바 ‘메가 FTA’가 잇따라 추진되는 등 관세철폐를 통한 무역 자유화 노력이 활발하다. 하지만 이들 나라 모두 한편으로는 기술규제를 강화하며 보이지 않는 무역기술장벽(TBT)을 높여가고 있다.

TBT(Technical Barriers to Trade)는 특정 국가가 자국으로 수입되는 제품에 차별적인 기술규정이나 표준·인증 등을 적용해 국가 간 교역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안전, 환경보호, 품질 향상, 국가 안보 등 기술규제 목적은 다양하지만 해당 국가로 제품을 수출해야 하는 나라 측면에서는 결국은 시장 진출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세계무역기구(WTO)는 회원국이 자국 기술규제를 변경하거나 새로운 규제를 도입할 때 사전에 관련 내용을 통보하도록 하고 있다. 갑작스런 기술규제 강화나 터무니없는 규제 도입으로 인한 무역 장애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WTO TBT 통보문은 해마다 늘어나 최근에는 매년 1500건 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TBT 통보문 수는 지난 2000년대 초만 해도 500~700건에 그쳤으나 2007년 1000건을 넘어선데 이어 2012~2013년 두해 연속 1500건을 돌파했다. 아직 WTO 공식 통계가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국가기술표준원이 추정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에도 1500건을 상회한 것으로 보인다.

국가별로는 신흥국에서 선진국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TBT 통보문을 보내고 있다. 2013년 기준 사우디아라비아가 214건으로 가장 많은 통보문을 내놓았다. 주요 국가 중에는 미국이 103건으로 가장 많았고, EU(93건)와 중국(90건)도 활발한 기술규제 움직임을 보였다. 우리나라는 같은 기간 45건의 통보문을 보냈다.

규제 목적별로는 보건·안전이 978건으로 주를 이뤘고 △환경보호(282건) △품질요건, 기만행위 방지 및 소비자 보호(각 241건) △소비자 정보 제공(82건) △무역장벽 최소화 또는 제거(49건)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하나의 기술규제가 여러 목적을 동시에 지닌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같은 기술규제는 실제 국가 간 무역 장애요인으로 작용하며 정부 대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난 2013년 브라질은 급수 기능이 있는 제품에 안전·에너지 효율 규제 도입을 발표했으나 냉장고에 중복규제가 적용돼 문제가 됐다. 냉장고는 이미 전기안전 규제를 받는 상황이었다. 이에 우리 정부가 WTO TBT위원회와 브라질 규제 당국을 방문해 중복 규제 철회를 요청, 냉장고는 대상에서 제외됐다.

EU에서도 지난 2013년 냉장고·에어컨 등 가전제품에 쓰이는 냉매 사전충전을 금지하면서 기업에 제조공정 부담이 추가로 발생했다. 가스회수 공정을 추가해야 하고 회수 과정에서 제품 성능 저하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WTO TBT위원회, 한·EU FTA 등을 통해 규제 철회를 요청한 끝에 이듬해인 2014년 EU가 우리 측 요구를 수용했다.

최근 들어서는 기존 선진국뿐 아니라 신흥·개도국이 기술규제를 강화하면서 수출기업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선진국은 이미 기술규제 플랫폼을 갖추고 그 틀에서 보완·강화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신흥·개도국은 급증하는 외산 수입품으로부터 자국 시장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갑작스레 신규 기술규제를 도입하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지난해 중남미의 한 국가는 인증 획득이 가능한 시험소 인프라도 제대로 구축하지 않은 채 가전제품 에너지 효율 규제를 시행하려 했다. 준비기간도 2개월에 불과해 사실상 수출 기업의 정상 대응이 어려웠다. 다행히 해외 시험 성적서 통용 요구가 받아들여졌으나 갑작스런 기술규제 강화의 문제를 보여준 사례였다.

우리 수출 기업의 해외 기술규제 대응 역량이 낮은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수출 대상국의 기술규제가 바뀌면 정책 또는 기술적으로 사전 대응이 필요하지만 우리 기업의 관심도와 분석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지난달 국가기술표준원이 개최한 TBT 세미나에서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9개 조사 대상 기업 가운데 기술규제 대응 인력을 갖춘 곳은 절반을 밑돌았다. 이들 기업은 정부 지원 요구 사항으로 관련 정보 제공을 가장 많이 꼽았다. 특히 대기업에 비해 중소기업의 대응 역량이 떨어지는 것으로 지적된다.

조영신 국표원 기술규제대응국장은 “수출 대상 국가의 기술규제 변화가 실제 우리 기업 수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TBT의 중요성을 전파하고 정보를 제공하는데 힘쓸 방침”이라며 “중소기업이 해외 기술규제를 충족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부분도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m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