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훈민 작가는 과학고등학교 조기졸업과 카이스트(KAIST)라는 엘리트 코스를 거쳤지만, 어릴 적 꿈을 좇아 메이커의 길에 들어섰다. 그에겐 눈앞에 보이는 안정적인 생활보다 꿈이 우선이었다.
고훈민씨는 “아주 어릴 때부터 TV에서 본 미국의 개러지 워크숍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며 “막연히 과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청소년기를 보냈고, 과학고와 카이스트에 진학해 기계공학을 공부한 것도 직접 만드는 일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정작 대학에 가니 학부에서는 직접 만드는 일의 비중이 매우 적었고, 학과 공부 압박이 심해 따로 시간을 내서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이 어려웠다”고 밝혔다.
만들기에 대한 아쉬움이 생긴 고씨는 카이스트 남학생의 대부분이 진학하는 대학원을 가지 않으면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씨는 “남학생은 거의 90%가 대학원에 진학하는데, 대학원 분위기나 연구주제가 저와 맞지 않을 것 같았다”면서 “대학원 졸업 후 진로가 대기업 연구소에서 일하는 것인데, 당시 대기업들이 제시하는 비전속에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꼈다”고 설명했다.
진로를 고민하던 중 우연히 신문에서 ‘팹(fab)’ 이라는 책의 서평을 읽고 답을 찾았다.
그는 “제가 고민하던 문제들을 저자도 고민했고, 그에 대한 답으로 제시한 디지털 제작소 ‘팹랩’의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며 “대학이나 기업 밖에서도 뭔가 의미 있는 연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고 팹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목표가 생긴 고씨는 군복무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국제협력단(KOICA) 국제협력요원을 택했고, 스리랑카 직업전문학교에서 CAD 교육을 했다. 그 뒤 바르셀로나 팹랩에서 팹 아카데미(Fab Academy)를 수강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팹랩 서울을 설립하는데 참여했다. 그러나 막상 팹랩을 만들고 보니 이상과 현실이 달랐다.
그는 “하고 싶은 연구를 하기 위한 재정 문제가 걸림돌이었다”며 “재원 마련을 위해 여기저기 기획서를 내고, 행사를 진행하는 일이 반복됐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팹랩을 나와 독립 창작자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현재는 과천과학관, 카이스트, 한국과학창의재단, 아트센터 나비 등과 함께 메이커스페이스 관련 컨설팅 및 워크숍 등을 하면서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해외 메이커 문화를 접한 고씨는 이미 사회에 메이커 생태계가 정착된 시스템이 한국에도 자리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외국은 디지털 제작기반의 DIY 문화에 ‘메이커’라는 딱지가 붙기 전부터 오랜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 기업, 개인 메이커 간의 괴리가 적다”며 “학계도 연구결과에 대해 기업과 메이커 커뮤니티에 전달할 수 있는 것을 빠르게 유통하고, 만들기나 해킹 경험이 있는 창업자들이 설립한 기업이 많아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하고, 메이커나 관련 전공을 공부한 학생이 자연스럽게 고용되는 생태계가 만들어져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은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많지만, 새로운 트렌드를 읽고 사업화하는 상상력이 조금 아쉽다”며 “좋은 부품으로 훌륭한 결과물을 만드는 것보다, 저렴한 부품과 방식으로 기존에 불가능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시도들이 많이 일어나야 메이커 운동이 단순히 취미나 동호회 활동을 넘어 사회적, 경제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권건호기자 wingh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