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로 뽐내던 한국의 빛 14년.
전자신문이 특별기획한 ‘이현덕의 정보통신부’는 한국의 독창적 정부조직이었던 정보통신부의 화려했던 14년 발자취를 재조명하는 대장정이었다.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던 게 ‘IT’였고 IT는 한국의 대표 브랜드였다. 김영삼정부가 단행한 정부조직 개편 중 가장 잘한 일로 정보통신부 출범을 꼽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보통신부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자’는 구호 아래 미래를 향해 달렸다. 체신부의 TDX 개발과 정보통신부의 CDMA 세계 첫 상용화, 초고속인터넷망 구축 등으로 한국은 ‘인터넷강국’ ‘IT강국’이란 신화를 창조했다.
국민의 기대와 박수갈채를 받던 정보통신부가 왜 14년의 영화를 뒤로 한 채 이명박정부 들어 갑자기 역사의 뒤로 사라졌는가. IT강국이라면서 주무부처인 정보통신부를 ‘IT인수분해론’이란 해괴한 논리로 간판을 내린 게 타당한 일인가. 그 판단은 국민의 몫이다.
특별기획은 역대 대통령들의 IT관과 정책의지, 청와대와 장관들이 커튼 뒤에서 벌이는 파워게임, 장관 발탁 막후, 주요 정책 추진 등을 진실대로 기록하고자 했다. 역사적 평가를 차기 정권 담당자들이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디지털강국으로 재도약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특별기획은 사관(史官)의 자세로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내용을 정리했다. 기자가 진실의 문을 두드렸지만 일부는 응답을 피했다. 의욕은 넘쳤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한 점도 있다.
역대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정부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이제는 인수위 몇 사람이 밀실에 모여 정부조직을 칼질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역대 정부 중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에, 전두환 대통령은 전자산업 육성에 집중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보화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그는 신한국 창조의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 정보화라고 확신했다. 김 대통령은 1996년 10월 14일 청와대에서 사상 처음 서류 없는 회의를 주재했다. 물론 이벤트였지만 정보화의 새 지평(地平)을 여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정보통신부 출범의 숨은 공신은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국회의장 역임)이다. 그는 정보통신부 출범이 무산될 처지에 놓이자 비서실장 직속으로 실무팀을 구성해 개편안을 만들고 김 대통령의 최종 결심을 받아냈다. 윤동윤 장관의 증언으로 확인한 사실이다.
특별기획 연재 중 김 대통령과 인터뷰를 추진했다. 전자신문이 발간한 ‘대통령과 정보통신부’라는 단행본이 나오자 김 대통령 측에서 연락을 해 왔고 정보통신부 폐지에 대한 김 대통령의 입장이 궁금했다. 하지만 인터뷰는 성사되지 못했다. 김 대통령 건강이 안 좋아 서울대병원에 장기간 입원했고 최근 퇴원 후 의사를 다시 타진했지만 어렵다는 답변이었다. 김 대통령은 얼마 전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김 대통령은 후보시절 노태우 대통령과 제2 이동통신 사업권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노 대통령의 사돈인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의 대한텔레콤이 사업자로 선정되자 특혜 의혹이 제기됐다. 선경은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청와대가 사업권 반납을 권고한 공문을 보낸 사실을 확인했다. 뒤늦은 특종이었다. 선경그룹은 문민정부 들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 오늘의 SK텔레콤을 소유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전형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나가겠다”면서 “초등학교부터 컴퓨터를 가르치고 대학입시에서도 컴퓨터 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김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겼고 국정 운영에 관한 사항을 깨알같이 기록한 27권의 국정노트를 남겼다.
김 대통령은 문민정부 시절 추진한 개인휴대통신(PCS)사업자 선정 등 기간통신사업자에 대한 검찰수사를 지시했다. 이 수사로 잘나가던 정보통신부 고위 관료들이 검찰에 소환돼 수사를 받고 구속됐다. 당시 정홍식 차관 구속에는 동정 여론이 많았다. 국회조차 정 차관 구명에 나서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청와대 10년 근무기록을 가진 그는 많은 정책 자료를 보관하고 있었다. 취재에 그의 도움이 컸다. PCS 수사 후유증은 컸다. 이 사건 후 정보통신부 출신 관료 중 한 사람도 장관에 발탁되지 못했다. 정 전 차관은 2000년 8월 14일 정부의 광복절 특별사면·복권조치에 따라 사면·복권됐다. 기자는 검찰 수사과정에 가려진 많은 뒷이야기를 취재했으나 기사화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인터넷을 즐겨 사용해 ‘인터넷 대통령’으로 불렸다. 그는 2003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농경 시대와 산업화를 거쳐 지식정보화 시대에 성공적으로 진입했으며 고급 두뇌와 창의력, 세계 일류의 정보화 기반을 갖고 있다”며 “과학기술을 부단히 혁신해 제2의 과학기술 입국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그는 과기부총리제를 도입했다.
노 대통령은 야인이던 1993년 사무실에 그룹웨어를 설치해 전자결재를 한 적이 있었고 청와대 이지원시스템을 개발해 특허등록을 할 정도로 IT분야 전문가였다. 노 대통령은 전자신문에 난 기사를 읽고 장관이나 보좌관에게 수시로 내용을 확인해 관계자들을 늘 긴장시켰다.
노 대통령은 정보통신부와 과학기술부를 폐지하는 이명박정부의 정부조직개편안에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 일은 신구 정권 간 불화의 씨앗이 됐다.
정보통신부 출범의 산파역은 윤동윤 체신부 장관이다. 체신부 관료로 사무관부터 승진해 장관까지 오른 인물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윤 장관은 정보통신에 확고한 신념과 해박한 지식, 폭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체신부 숙원이던 정보통신부 출범을 성사시켰다. 그는 CDMA를 세계 처음으로 상용화했고 이를 반대하던 삼성의 체신부 출입을 금지시킨 일은 지금도 화젯거리다.
경상현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은 미국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75년 해외과학자 유치 프로그램에 따라 귀국했다. 이후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 한국전산원장, 체신부 차관을 지냈다. 그는 PCS 표준으로 CDMA를 고수했다. 청와대의 요구도 거부했다. 김 대통령이 통신사업자 선정 방식에 대로(大怒)해 경 장관을 경질했지만 내막은 CDMA 방식 고수였다.
그 뒤를 이어 취임한 이석채 장관은 경제기획원 출신이다. 그는 청와대에서 ‘CDMA를 고집하지 말라‘는 지침을 받았지만 김 대통령과 독대해 CDMA 방식을 관철시켰다. 그는 재임 중 정통부에 정보화기획실을 신설했다. 그는 PCS사업자 선정과 관련, 김대중정부 들어 검찰수사를 받고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논리가 정연하고 달변이었다.
강봉균 장관은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1969년 행정고시 6회에 합격,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박정희정부의 개발시대 ‘최고의 보직’이라는 경제기획국장을 두 번이나 맡았다. 강 장관은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김대중정부 출범 후 김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으로 청와대 정책기획, 경제수석을 거쳐 재정경제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김대중정부에서는 대기업 CEO 출신 장관 시대가 열렸다. 그 첫 스타트는 배순훈 대우전자 회장이다. 그는 우정사업에 민간경영 방식을 도입했다. 배 장관은 김 대통령이 재벌 개혁의 핵심으로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한 5대 그룹 빅딜 ‘반대’ 발언으로 물러났다.
후임으로 남궁석 삼성SDS 사장이 새 정통부 장관에 발탁됐다. 그는 사이버코리아21 운동을 전개했다.
안병엽 장관은 행정고시(11회)에 합격, 경제기획원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안 장관은 1996년 7월 5일 정보통신부 정보화기획실 초대 실장으로 임명됐고, 차관 재임 1년 8개월 만에 장관으로 발탁됐다. 그는 재임 중 IMT2000사업자 선정 작업을 마무리했다.
안 장관이 물러나자 장관으로 양승택 한국정보통신대학교 총장이 발탁됐다. 그는 TDX와 CDMA 개발 주역으로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을 역임했다.
김대중정부 마지막 장관으로 이상철 KT 사장이 임명됐다. 그는 이동통신사에 처음으로 영업정지 조치를 내렸고 KT를 민영화했다. 재임 중 인터넷대란이 발생했으나 수습에 능력을 발휘했다.
노무현정부 들어 첫 정보통신부 장관은 진대제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사장이 발탁됐다. 그는 아들의 병역문제로 곤혹을 치렀으나 고비를 넘긴 후 최장수 장관의 기록을 세웠다.
그는 스타 장관이었다. 대통령 업무보고를 파워포인트로 해 다른 부처에 비상이 걸리게 했다. 이어 PM제도를 처음 도입하는 등 정부의 혁신 드라마를 주도했다. 그는 신성장 모델 IT839전략 수립과 정국의 골칫거리인 DTV 전송방식 논쟁을 해결했다. 이어 APEC정상회의 기간 중 IT전시회를 열어 각국 정상에게 한국의 ICT 발전상을 소개했다. 그는 장관 재임 시 진행한 각종 업무를 노트에 꼼꼼히 기록했다. 모두 16권이었다. 그와는 아침 7시 이전에 이메일을 주고받거나 전화통화를 했다. 그 시간대에 전화 통화를 한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이어 노준형 차관이 장관으로 발탁됐다. 그도 경제기획원 출신이다. 그는 제한적인 인터넷 본인 확인제를 도입했으나 뒤에 위헌판결을 받았다.
노무현정부 마지막 개각에서 유영환 차관이 장관에 임명됐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꼈다. “조직을 지키지 못한 죄인이 무슨 말을 하겠느냐”고 했다.
정보통신부 관료 중 입지전적인 인물로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박성득·김창곤 전 차관이다. 박성득 전 차관은 기술계의 대부로 기술고시 출신 첫 차관이었다. 전국의 가난한 집안 수재가 다 몰린다는 체신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체신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작은 키에 호방한 성격이어서 별명이 ‘작은 거인’, 중국의 등소평과 비유해 ‘박소평’으로 불렸다.
김창곤 전 차관은 기술고시 합격 후 다른 부처로 발령나자 체신부로 오기 위해 다시 기술고시를 본 남다른 이력의 소유자다.
특별기획에서 기업과 민간을 다루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쉽다. 특히 당시 미수교국이던 중국을 오가며 TDX 등 전자제품 수출의 외교관 역할을 한 김호용 한샤인인터내셔널 회장과 이건수 동아일렉콤 회장의 활약상은 많은 부문이 베일에 가려있다. 취재과정에서 알게 된 모 장관의 가정사는 가슴 아픈 사연이었다. 혼외 아들이 바르게 잘 자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직자는 리더십과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계급장을 떼고 나면 남는 건 공과(功過)뿐이다. 정보통신부를 대신해 미래창조과학부가 국운 융성의 미래융합 전략을 창조해 디지털강국의 주역이 되길 기대한다. 차기 정권에서 없어질 부처 1순위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 특별기획을 연재하는 동안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증언하고 자료를 챙겨주신 모든 분과 전자신문 전·현직 발행인과 편집국장, 편집국 후배들에게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부족한 글을 애독하고 분에 넘치게 격려와 성원을 보내 주신 애독자들에게도 사의를 표한다.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허허로움과 부족함을 느끼며 노트북을 닫는다.
IT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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