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과 같이 치열한 글로벌 전자·정보통신산업 경쟁환경은 과거 로마시대의 흥망성쇠를 연상케 한다. 합리적인 통치이념과 자주적 시민들의 응집력은 유럽을 오랫동안 통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유지돼 온 로마 전통 폐단과 넓은 영토 밖의 이민족에 대한 경계 부족으로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일본 소니의 화려했던 시대는 혁신제품의 부족으로 급격하게 저물었다. 이와 달리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겼던 중국 전자 업체들은 빠른 벤치마킹을 통해 눈부신 약진을 거듭해 글로벌 기업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영원한 승자와 패자는 없다’는 게임의 법칙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디스플레이 제조업체의 순이익률은 현재 10%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디스플레이의 핵심 소재인 액정, 편광필름 그리고 보호필름 등을 판매하는 독일과 일본의 소재 챔피언 기업들은 고수익으로 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다.
얼마 전 한국 대학에 글로벌 화학소재업체들이 잇따라 부설 연구소를 설립해 화제를 모았다. 머크, 바스프에 이어 벨기에에 본사를 둔 글로벌 화학업체 솔베이까지 한국에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하고 디스플레이 관련 소재 연구에 착수했다.
삼성그룹은 그룹 내 소재 전문가들을 모아 소재연구센터(가칭)를 수원으로 집결했다. LG화학도 배터리와 조명 등 전자에너지소재 산업에서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이들 소재 업체의 핵심 목표는 원천 소재 개발과 핵심 인력 양성 등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있다.
하지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지원하고 이끌어줘야 하는 대학에서 대부분의 교수들은 국내외 대학평가를 위한 실적 확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대학 내 교수 평가 및 연구비 수주 시스템이 주로 연구 논문으로 평가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연구 논문 수와 질을 관리하고, 연구자의 전문성과 별개로 연구 논문이 잘 나올 수 있는 분야로 방향 전환을 하는 일도 종종 있다. 이로 인해 많은 교수들이 우수한 연구결과물들을 개발하고도 특허출원, 사업화, 기술이전 등의 기회를 놓치는 일이 종종 있다.
최근 학교 내 산학협력단 변리사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근래 출간된 논문들을 변리사가 살펴보고 특정 결과가 특허로 사용될 수 있다는 선행결과 조사서를 먼저 보내줬던 것이다. 과거 산업체 경험을 토대로 특허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논문 작성과 출간에 전념하다 보니 특허 출원의 중요성을 잊고 있었다. 능동적인 산학협력단의 역량이 대학 교수 개인의 부족한 역량을 보완해준 셈이다.
이를 통해 그나마 치열한 전자소재부품 전쟁터의 후방을 담당하는 일원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글로벌 전자산업 경쟁에서 소재부품은 화두가 아닌 필수 요소다. 이를 위한 게임의 법칙은 원천소재(특허)고, 많은 글로벌 기업들은 우수한 인력과 연구개발능력을 갖고 있는 한국을 활용 대상 1순위로 꼽고 있다. 현재 대학들의 치열한 순위 경쟁과 논문 수 싸움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큰 우를 범할 수 있다.
공학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이용해 인간에게 유용한 제품을 만드는 학문이다. 언젠가부터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치열한 글로벌 전쟁에서 생존하고 나아가 일등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진성 한양대 교수 jsparklime@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