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 정전’과 계속된 전력난으로 공급 위주 전력 정책은 한계를 드러냈다. 전력수요는 지속 늘어나지만 발전소, 송배전 인프라를 무턱대고 늘리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사회적 인식차원에서도 이제 불가능하다. 수요 관리가 에너지정책의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수요관리로 발전소 신규 건설을 억제하고 에너지효율도 크게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ICT 융합으로 다양한 사업 기회와 대규모 고용 창출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되면서 수요관리는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수요관리서 새로운 기회 찾는다
지난 2000년, 200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다섯 차례의 블랙아웃을 겪었다. 2003년 뉴욕과 뉴저지 등 동북부 8개 주도 광범위한 정전 피해를 입었다. 당시 추산한 피해금액만 100억달러에 달한다. 전력수요 증가와 송전선 부족이 정전 발생의 큰 원인이었다. 우리나라도 지난 2011년 9월 15일 정전을 겪었다. 잠깐의 정전으로 620억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뒤늦게 찾아온 무더위로 전력 이용량이 6725만㎾까지 급증했지만 공급이 이에 미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국내외에서 발생한 정전은 전력수급 불안정이 빚어낸 사고라는 것이 전문가 지적이다. 이는 전력공급 일변도 에너지 정책으로는 더 이상 안정적 전력 공급을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정부도 이를 인식하고 9·15정전 이후 에너지 정책에 매스를 들이댔다. 발전소 등 에너지 생산설비를 늘리거나 불편을 감수하며 강압적으로 전력소비를 줄이는 방식보다 전력 소비 효율화를 유도하는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에너지 정책 중심으로 수요관리로 이동했다.
수요 관리는 소비자 전력사용 패턴을 조절해 에너지효율을 높이는 활동을 말한다. 발전소 건설 등 전력공급 확대와 달리 최소 비용으로 에너지효율을 높인다. 수요관리가 관심을 받는 이유는 또 있다. ICT와 융합이 이뤄지면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도 가치가 점차 커지고 있다.
◇전력수급안정, 신산업 창출 두 마리 토끼 잡는다
정부는 수요관리와 ICT 융합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한다는 목표다. 지난 7월 산업통상자원부가 6대 에너지 신산업 육성 계획을 수립, 발표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정부는 수요관리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사용자의 자발적 절감 노력이 필수라고 판단해 시장 창출로 민간 참여를 이끌어낸다는 복안이다. 성장 가능성이 큰 사업 모델을 개발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는다는 게 정책의 핵심이다.
△전력 수요관리 사업 △에너지관리 통합서비스 사업 △독립형 마이크로 그리드 사업 △태양광 렌털 사업 △전기차 서비스·유료충전 사업 △화력발전 온배수열 활용 사업이 에너지 분야의 새로운 성장동력 사업으로 선정됐다. 정부는 이 사업으로 2017년까지 약 1만개 일자리가 창출할 것으로 예상했다.
지능형 DR사업은 빌딩이나 공장설비에 ICT기반 에너지관리 시스템을 설치해 수요에 따라 에너지 소비를 능동적으로 조절하는 모델이다.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통과로 기반은 갖춰졌다. 사업장의 에너지절약을 컨설팅하고 ICT기반 인프라를 구축하는 사업이 현재 추진 중이다. 정부는 대규모 사업장을 보유해 독점 우려가 있는 대기업 참여를 30%로 제한하고 한국전력이 관리하는 전력소비 데이터 사용권도 보장하는 등 민간 참여를 위한 진입 장벽을 제거했다.
절약한 전력 사고 파는 거래 시장 열린다
지난 4월 국회 본회의에서 ‘수요자원 전력 시장거래’와 ‘정부승인 차액 계약 제도’를 골자로 한 전기사업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개정안은 그동안 한국전력과 전력거래소가 운영하던 수요관리시장을 민간이 운영하고 시장 거래를 허용하는 것이 골자다. 지금까지 전력수급 비상이 걸리면 한전과 전력거래소가 사전 계약된 사업장에 절전을 요청하고 감축한 전력량만큼 지원금을 지급해 왔다. 개정안 통과로 해당 사업에 민간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민간기업은 자체적으로 필요시 절전이 가능한 고객사를 모으고 이를 전력거래소에 입찰할 수 있다. 만약 10㎿ 상당의 절전량을 모으면 이를 거래시장에 10㎿ 발전량으로 입찰할 수 있다. 발전소를 가동하는 것과 절전을 통해 수요를 감축하는 것이 전력수급 차원에서 동일하다는 개념이다.
개정안을 발의한 전하진 의원 측은 수요관리사업자가 기업 공장, 건물의 전력수요를 감축해 연간 200만㎾ 이상의 전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원전 2기가 생산하는 전력량이다. 정부가 6차 전력수급계획에서 밝힌 발전소 신규 설비투자비용은 1만㎾당 98억원이다. 이를 감안하면 수요관리를 통해 2조원의 발전소 투자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전기요금 하락도 기대된다.
기존 발전사업자 외에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해 입찰에 응하는 전력자원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미국의 전력 수요관리 비용은 ㎾h당 1.7센트다. ㎾h당 10센트인 발전 비용보다 저렴해 전력시장에서 수요관리 자원을 우선 확보하고 있다. 전력생산가격이 낮아지는 효과가 발생하고 이는 곧 소매요금 인하로 이하질 수 있다. 전력 시장에 경쟁체제가 본격 도입된다는 예상도 따른다. 발전사와 한전만이 존재하는 경직된 전력시장에 신규 사업자가 등장함으로써 경쟁체제 도입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분석이다.
에너지저장장치(ESS)와 에너지관리시스템(EMS)을 이용해 절약한 전력을 공급발전량과 대등하게 거래할 수 있는 ICT 기반 수요관리자원 시장이 열릴 가능성도 높아졌다. 기존에 없던 ESS서비스 사업자, EMS 공급자, AMI·스마트플러그를 활용한 에너지 빅데이터 서비스 등 새로운 서비스와 시장참여자가 출현하고 다양한 유형의 수요관리 사업모델이 확산될 것으로 기대된다. 산업부는 ESS, EMS, 스마트그리드 분야의 대규모 신규투자를 유도하면 2017년까지 총 3조5000억원 규모의 시장이 창출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를 통해 1만5000개 일자리와 70만~100만㎾의 전력피크 절감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내다봤다. 산업부 관계자는 “두 개정안의 국회 통과로 본격적인 시행령 마련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며 “수요관리 시장거래는 10~11월 시행해 올겨울에는 수요자원이 시장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해외 전력시장은 이미 수요관리 시장 개화
미국은 수요 자원을 전력시장에서 거래해 피크를 줄이고 확보한 수요반응자원을 예비력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능형 수요관리 벤치마킹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2008년 기준 미국의 수요 자원은 41GW에 달했다. 피크 5.8% 수준인데 이를 절감하면 20년간 660억달러를 절감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수 전력시장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미국 전력시장에서 PJM은 수요자원시장을 가장 활발하게 운영하는 지역으로 손꼽힌다.
에너지, 용량, 보조서비스 시장을 통해 수요자원과 발전자원을 차별 없이 거래한다. 60여개 수요관리사업자가 전력수요를 절감하며 발전자원과 경쟁을 펼치고 있다. 여기서 에너녹 등 세계적 수요 관리 전문기업이 탄생했다. 에너녹은 2009년 기준 3.6GW 수요 자원을 확보했다. 건물효율 사업을 확대해 2010년 3000억원 규모 매출을 올렸다. 캘리포니아 전력시장은 전력 구매에 있어 수요 자원에 우선순위를 둔다. 이어 신재생, 고효율 및 저탄소 공급자원과 전통 발전자원을 확보하고 있다.
최호기자 snoop@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