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국가보다 금융 위기를 잘 극복해냈다. 탄탄한 제조업 경쟁력이 뒷받침된 덕분이다. 한국뿐 아니라 독일·중국·일본 등 제조업 비중이 높은 국가는 금융위기로 인한 타격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당시 제조업이 재조명받게 된 이유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는 오히려 제조업을 홀대하면서 경제 활력을 떨어뜨리는 악수를 뒀다. 지난 2012년 이후 우리나라 제조업 생산 증가율 둔화 움직임은 뚜렷해지고 있다. 삼성전자·현대차 등 특정 대기업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아져 체질이 약화됐고, 낡은 산업이란 편견 탓에 정부의 관심에서도 멀어졌다.
그 사이 중국은 노동집약적 전통 산업을 넘어 스마트폰·TV·디스플레이 등 첨단 산업까지 우리나라의 턱밑으로 쫓아왔다. 대한민국 제조업은 침몰하기 직전의 배처럼 흔들리고 있다.
◇세계 각국 제조업 부활에 안간힘
금융위기 이후 미국·독일·일본 등 선진국은 잇따라 제조업 부활을 선언하고 적극적인 산업 육성 정책을 내놓고 있다. ‘토목 경제’ ‘창조 경제’라는 구호에만 집착하면서 사실상 제조업 육성에 손을 놓은 우리나라와 대조적이다.
미국은 과거 시장 실패가 명백하게 인정되는 때에 한해 정부가 개입하는 등 제조업에 관해 소극적 정책 기조를 보였다. 그러나 오바마정부가 들어서면서 방향이 바뀌었다. 금융·세제 지원을 확대해 자국 제조업의 국내 복귀에 힘쓰고 있고, 첨단 제조업 육성에도 적극 나서는 분위기다. 최근 미국에서는 2000년 이후 발생한 경상수지 악화와 소득 양극화가 제조업을 소홀히 한 결과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앤디 글로브 인텔 전 회장은 “제조업이 고용 창출에 취약한 구조를 개선해 일자리 중심 경제로 나아가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며 “일자리는 기업 생산능력 확대에서 발생하므로 인력, 기술, 인프라, 제조능력 등 미국 산업 생태계와 공동 자산을 확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심지어 제조업 해외 이전에 따른 일자리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규제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과 독일도 첨단 제조업에서는 밀릴 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자국 기업이 해외로 생산거점을 옮기지 않도록 지원을 확대하는 한편 막대한 자금을 첨단 제조업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있다. 심지어 서비스 산업 위주의 성장에 집중해온 영국도 최근 외국인 투자 유치로 산업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제조업을 부활시키는 쪽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경제가 발전하면 제조업 비중이 낮아지고 서비스 비중이 높아지는 이른바 ‘탈공업화 이론’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우리나라만 이 같은 세계적인 트렌드에서 비켜 서 있다.
◇한국 제조업 경쟁력 약화…발등에 불이 타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제조업 경쟁력을 가진 국가로 인식된다. 그러나 첨단 제조업 분야에서는 경쟁력이 취약한 실정이다. 최근 디스플레이·TV·휴대폰 등 우리 주력 산업 분야에서 중국의 약진은 눈부실 정도다. 그나마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아직 우위를 보이고 있지만, 삼성전자 등 대기업들이 중국에 차세대 첨단 제조라인까지 구축하고 있어 격차가 줄어드는 것은 시간문제다.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는 중국이 오히려 우리나라를 앞질렀다는 분석도 나온다.
전자공학 전공의 한 대학교수는 “미국·일본은 자국 기업이 국내에 생산시설을 구축할 수 있도록 안간힘을 쓰는데, 우리 정부는 대기업이 해외에 첨단 시설을 내보낼 수 있도록 신속하게 ‘서비스’를 해줬다”며 “이 같은 행태를 멈추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 우리 경제 전반에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뿐 아니라 대기업들도 R&D 투자를 유독 강조하고 있지만, 여전히 선진국과 비교하면 미흡한 수준이다. 우리 제조업의 부가가치가 낮은 원인이다. 국내 제조업의 R&D 투자 비중은 약 12%다. 스웨덴(22%), 일본(15%), 미국(14%) 등 다른 국가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다. 제조업 부가가치율은 20%에 불과하다. 미국(35.8%), 일본(31.9%), 독일(29.6%) 등 선진국과 비교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원천 기술과 디자인 등 핵심 분야에 R&D 투자를 확대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한편, 단순 제조업에서 벗어나 IT융합과 제조업의 서비스화 등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기업 가치 증대와 일자리 창출로 이어져 우리나라 경제 선순환 고리를 잇는 데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다시 제조업이다
우리나라 제조업이 다시 한 번 세계 시장에 우뚝 서기 위해서는 중국 등 후발 국가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제품 부가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우선 종전 단순 제조업 구조를 벗어나 서비스와 결합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향이다. 스마트폰·TV 등 주력 시장에서 우리나라와 중국 제품간 품질·기능 차이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단순 하드웨어로는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
그러나 제품과 서비스를 결합하면 부가가치를 얼마든지 높일 수 있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롤스로이스다. 이 회사는 항공기 엔진 및 관련 부품 위주의 사업에서 벗어나 고객의 엔진 상태를 주기적으로 점검해주는 사업 모델을 구축했다. 항공사는 엔진 교체나 보수 스케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고, 롤스로이스는 엔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안정적인 매출을 보장받을 수 있다. 현재 롤스로이스의 서비스 매출 비중은 전체 매출의 절반을 넘어섰다. 우리나라에서도 성공 사례가 있다. 바로 정수기 대여 사업이다. 정수기 업체들이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고 제품만 팔았다면 시장이 이처럼 큰 규모를 형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향후 첨단 제조업 분야에서는 서비스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정보기술(IT)의 역할도 중요하다. IT를 활용하면 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 자동차 산업이 대표적이다. ‘자동차는 그동안 기름으로 움직였지만 이제는 소프트웨어로 움직일 것’이란 말까지 나온다. 그러나 우리나라 IT 융합 경쟁력은 일본·독일 대비 80% 수준에 불과하고, 센서 등 핵심 기술은 대부분 해외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정부 차원의 융합기술 연구 지원 정책과 이를 뒷받침할 네트워크 기반 조성이 필요한 이유다.
우리 제조업체가 국내로 유턴할 수 있도록 좀 더 실효성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삼성전자 등 특정 기업 의존도를 줄이고, 공정한 거래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 중소 제조기업의 CEO는 “특정 대기업 의존도가 너무 높아지면, 이를 적절히 견제할 수 있도록 정부의 균형 감각과 정책이 필요하다”며 “100년 전 미국이 독점 등 불공정 거래 관행을 없애고 세계적인 강국으로 거듭난 사례를 참조할 만하다”고 말했다.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