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87> 노무현 정부 첫 조각

노무현정부의 첫 조각(組閣)은 ‘파격’ 그 자체였다. 관료사회의 충격이 가장 컸다.

역대 정권 사상 처음으로 국민 인터넷 추천제로 장관 후보자를 구했다. 그간의 관행과 서열을 철저히 무시했다. 5단계 심사과정을 거쳐 적재적소(適材適所)의 인물을 발탁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도 했지만 장관 자리를 고사(固辭)한 인사도 있었다.

조각 발표 형식과 절차도 기존 관행을 깼다. 과거 정부는 내각 발표 후 대통령이 임명장을 줬다. 노무현정부는 임명장을 준 뒤 명단을 일괄 발표했다. 과거와 정반대 형식이었다.

발표도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수석이 아닌 대통령이 기자들 앞에서 각료 인선 원칙과 배경을 설명했다. 낯설지만 신선한 충격이었다.

노무현정부가 출범한 이틀 후인 2003년 2월 27일.

청와대는 오전부터 바쁘게 돌아갔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 집무실에서 고건 신임 국무총리(대통령 권한대행 역임, 현 기후변화센터 명예이사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노 대통령은 “행정에 대한 고 총리의 능력과 투명성 외에 특히 안정성을 염두에 두고 임명한 만큼 국민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고 총리는 이에 대해 “대통령의 나무 받침대 역할을 충실히 수행, 국민이 걱정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2시. 청와대 본관 오른쪽 충무홀.

노 대통령은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에 임명된 김진표 대통령직인수위 부위원장(교육부총리 역임)을 비롯한 장관급 인사 19명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노 대통령은 정보통신부 장관에 진대제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사장(현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 회장), 과학기술부 장관에 박호군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현 한독미디어대학원대학교 총장), 문화관광부 장관에 영화감독인 이창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을 각각 발탁했다. 교육부총리는 인선이 늦어져 이날 명단 발표에서 제외했다.

노 대통령은 이들에게 임명장을 준 뒤 각각 기념촬영을 했다.

그런데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기념촬영을 끝낸 노 대통령이 느닷없이 다시 사진촬영을 하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의전(儀典)에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지금 잘못하는 것 같다. 장관들이 나와 사진을 찍을 게 아니라 총리하고 사진을 찍어야 소속이 분명해진다. 귀찮지만 한 번 더 사진을 찍자.”

노 대통령은 고 총리를 자신의 오른쪽에 서게 해 다시 국무위원들과 개별 기념사진을 찍었다.

노 대통령은 신임 국무위원들과 잠시 차를 마신 후 함께 버스를 타고 기자회견장인 춘추관으로 이동했다. 대통령이 국무위원들과 같은 버스로 기자회견장으로 가는 일도 처음이었다.

고 총리가 먼저 춘추관 2층 기자회견장에서 19명의 신임 장관을 차례로 소개했다. 경력과 인선 이유를 덧붙였다. 이어 김진표 경제부총리를 시작으로 신임 장관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국민에게 첫 인사를 했다.

노 대통령은 “분위기 쇄신용 개각을 하지 않고 장관 임기를 최대한 보장하겠다”며 “창조적 아이디어의 공급이 필요한 부처는 2년 또는 2년 반 정도 임기를 보장하고 지속적 개혁이 필요할 부처는 대통령 임기와 함께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또 “모든 행정에 대한 권한과 책임은 총리에게 넘기고 청와대 수석이 장관에게 시어머니 역할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며 책임총리제 운영 방침을 밝혔다.

노 대통령은 “한 분 한 분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답하겠다”며 기자들의 질문을 유도해 질의응답도 했다.

-인선 원칙은.

▲적재적소를 첫째 원칙으로 삼았고, 안배를 보완적 고려사항으로 삼았다. 개혁 장관을 말한 바 있는데 그것은 개혁성이 부각됐다는 뜻이다. 지역 안배는 해놓고 보니 자연스럽게 돼 있었고, 출신학교 안배를 하면 전체 인사가 엉망이 될 것 같아 포기했다.

-교육부총리 인선이 빠져 있는데.

▲경영 마인드를 갖추면서도 교육계 전체의 호감을 살 분을 못 찾았다. 몇 분 비슷한 분이 있는데 더 좋은 분을 찾기 위해 좀 시간을 갖기로 했다.

-총리 제청권은 얼마나 고려됐나.

▲인선이 세 배수로 압축됐을 때 자료를 보내 의견을 물었다. 총리가 어떤 부분에는 너무 파격적이라는 의견을 제시해 몇 자리가 바뀌었다.

-40대 전직 군수와 변호사를 행정자치부·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한 데 대해 지나친 파격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파격으로 보는 시각이 타성에 젖어 있다고 생각한다. 김두관 행자부 장관은 자치단체장으로서의 업적이 이미 많이 검증됐다. 변화를 지향하는 상징적 의미도 고려했다. 나는 법무부를 검찰청으로부터 독립시키려 한다. 검찰의 독립을 꾀하고 서열주의에 구속되지 않으려 한다.

노 대통령은 기자회견이 끝나자 큰 소리로 “잘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춘추관을 떠나기에 앞서 고 총리, 문희상 비서실장(국회 부의장 역임. 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등과 함께 1층 기자실을 찾아 취재진들과 일일이 악수했다.

노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인 2003년 1월 22일 고건 전 국무총리를 일찌감치 새 정부 국무총리 후보로 공식 지명했다.

노 당선인은 이에 앞서 2002년 12월 25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고 전 총리를 만나 총리직을 제안했다.

고 전 총리는 처음엔 이런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이미 국무총리를 거쳐 서울시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바 있었다.

고 전 총리의 회고록 증언.

“나는 신계륜 노 당선인 인사특보(현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런 말 하지 말라’며 거절했다. 노 당선인이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큰일이었다. 그래서 신라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는 노 당선인에게 ‘새 정권이 들어서면 새 얼굴을 총리로 내세워야 합니다. 5년 전 총리를 한 사람은 새 정부에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제 자신도 부담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노 당선인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개혁 대통령’을 위해선 ‘안정 총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제가 몽돌처럼 생긴 돌이라면 총리는 그 돌을 잘 받치도록 나무 받침대처럼 안정적인 사람이어야 궁합이 잘 맞습니다’라고 했다.”

몽돌은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해서 잘 굴러다니는 돌을 말한다. 고 총리는 고사(固辭) 끝에 나중에 몽돌의 받침대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회고했다.

첫 장관 인선은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

노무현정부는 5단계 인선과정을 거쳐 장관을 임명했다. 1차는 대통령직 인수위에 설치된 국민참여센터에서 인터넷으로 추천받은 장관 후보자를 정리해 분과별 인사위원회로 넘겼다.

당시 국민참여센터에 추천된 인사는 1870명이었다. 2차 심사는 분과별 인사추천위에서 했다. 인수위는 분과별로 인사추천위원회를 구성했다. 3차 심사는 인수위원장, 인수위 부위원장, 각 분과 간사, 청와대 비서실장 내정자, 정무수석 내정자, 민정수석 내정자, 당선인 인사특보, 인사보좌관 내정자가 정밀심사를 했다. 이때 장관 후보자의 경력과 장단점을 적고 인사추천위원회의 추천비율을 기록했다.

4차 심사는 장관 후보자에 대한 도덕성 등 정밀검증 작업을 했다. 5차는 당선인과 총리 내정자가 협의해 인선을 매듭지었다.

이종호 국민참여센터 본부장(계명대 교수,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 역임)의 설명.

“국민추천제로 올라온 사람들은 모두 장관 능력이 있는 인사들이었습니다. 국민 인터넷 추천제는 탕평인사를 하면서 숨은 인재를 발굴한다는 데 의미가 있었습니다.”

신계륜 당시 인사특보의 말.

“당시 당선인의 인사 자문에 응하면서 해당 부처를 대상으로 장관 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도 실시했습니다. 장관 추천을 위한 첫 여론조사였다고 생각합니다. 2월 12일 20개 정부부처 조사결과를 당선인에게 보고해 첫 조각에 참고하도록 했어요.”

그러나 장관으로 내정했지만 당사자가 끝까지 고사한 인사도 있었다. 청와대 관계자가 집으로 찾아갔지만 첫마디에 “못 하겠다”며 거절했다. 이후 계속된 설득에도 뜻을 꺾지 않았다. 아예 집을 비우기도 했다

막판에는 고건 총리 내정자가 일부 인사에 이의를 제기하며 임명제청을 거부했다.

일부 인사는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경남도지사 역임)과 강금실 법무부 장관(현 법무법인 원 고문)이었다.

정찬용 당시 인사보좌관 내정자(청와대 인사수석 역임)의 회고.

“고 총리 내정자를 만나 첫 조각에 관해 말씀드렸다. 두 사람을 보더니 ‘어, 이건 경우가 아닌데요’라고 말했다. 김두관 장관 내정자의 경우 ‘군수 출신이 전국의 광역단체장과 중앙부처 고위공무원을 진두지휘할 수 있겠으며, 영(令)이 서겠느냐. 나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후보자의 인품이나 친소관계가 아니라 경력 문제를 지적했다.”

강 법무장관 내정자는 현직 검찰총장보다 무려 11기나 후배였다. 김 내정자는 시골마을 이장을 거쳐 남해군수를 역임했다. 기존 시각에서 보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인사였다.

신계륜 당시 인사특보의 이어진 증언.

“고 총리 내정자는 검찰과 경찰을 지휘하는 업무 특성상 두 사람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고심 끝에 노 대통령이 고 총리의 뜻을 받아들이면 그렇게 하고, 다시 반대 의사를 전달했는데도 당선인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 총리가 노 당선인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협의했다.”

노 대통령은 취임식 후 청와대 2층 응접실에서 고건 총리와 문 비서실장, 정찬용 인사보좌관 등과 조각에 관해 막판 의견을 나눴다. 고 총리는 두 사람의 입각 재고를 요청했다.

노 대통령은 고 총리에게 “새 정부의 특징이 ‘개혁 장관, 안정 차관’ 기조인데 두 사람에 대해 나를 믿고 잘 해보자”며 양해를 구했다. 고 총리는 노 대통령의 뜻에 따랐다.

그러나 파격 인사, 충격 인사가 몰고 올 후폭풍을 당시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평검사들이 연판장을 돌리고 대검 간부들이 집단 사표를 제출하는 등 검찰 반발이 가장 거셌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검찰조직에서 한참 후배가 장관으로 부임한 이른바 ‘서열 파괴’가 주원인이었다.

IT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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