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날이 왔다. 2002년 12월 19일은 국민 선택의 날이었다.
이날 국민은 비주류 변방의 정치인인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16대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예상을 깬 민심(民心)의 결정이었다.
이날 밤 10시 28분 서울 여의도 민주당 2층 기자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감격에 벅찬 표정으로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는 “앞으로 저를 지지한 분들만의 대통령이 아닌, 저를 반대하신 분들까지 포함한 모든 국민의 대통령으로서 또 심부름꾼으로서 제 최선을 다할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린다”고 밝혔다.
당사 주위에는 수백명의 지지자가 모여 “노무현”을 연호했다. 그는 ‘대통령 후보’에서 ‘대통령 당선자’로 지위가 바뀌어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수십명의 청와대 경호원이 배치됐다.
대통령 선거는 숨 막히는 초접전이었다. 개표결과 노무현 후보는 1201만4277표(48.9%)를 얻어, 1144만3297표(46.6%)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57만980표(2.3%)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정권을 재창출한 민주당은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패배한 한나라당은 초상집처럼 침통했다. 투표함이 열리기 전까지 이회창 대세론이 선거판을 지배했다. 그러나 국민 선택은 달랐다. 빈농의 아들 노무현은 9회 말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다.
16대 대선의 변화는 기존 선거 방식을 뒤집었다는 점이다. 정당 중심이 후보자 개인 중심으로 변했다. 특히 인터넷이 정치적 위력을 발휘했다. 노무현 후보는 인터넷 힘으로 당선된 최초의 서민 대통령이었다.
노무현 후보는 2001년 9월 6일 부산롯데호텔에서 대선 출마를 공식선언했다.
그는 이날 “보통 사람의 시대를 열어가는 서민 후보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노 후보는 그해 12월 10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저서 ‘노무현이 만난 링컨’ 출판기념회를 겸한 후원회에서 “원칙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보통사람들이 살기 좋은 한국을 만들기 위해, 16대 대선에 출마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했다. 당원과 국민을 같은 비율로 섞어 선거인단을 구성했다.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을 무작위로 선정해 선거인단을 꾸렸다.
민주당 대선 경선에는 노 후보 외에 김근태(작고, 보건복지부 장관 역임), 정동영(통일부 장관 역임, 현 새정치민주연합 고문), 이인제(현 새누리당 국회의원), 한화갑(민주당 대표 역임), 유종근(전북도지사 역임) 등이 후보로 나섰다.
노 후보 캠프는 현역 의원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노 후보를 천정배 의원(법무부 장관 역임, 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이 가장 먼저 공개 지지를 선언했다.
민주당은 2002년 3월 9일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지역을 순회하면서 경선을 치렀다. 그 결과 16개 지역 중 11개 지역에서 1위를 차지한 노 후보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됐다.
노 후보는 그해 4월 27일 민주당 전당대회 대선 후보 수락연설에서 “정치 개혁, 원칙과 신뢰, 국민 통합의 3대 정권 청사진”을 제시했다.
노 후보의 대선가도는 험난했다. 자금과 인력이 모자랐다. 막판에는 지지율이 급락해 후보교체론에 시달렸다. 고난 끝에 그는 그해 11월 25일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이겼다. 하지만 국민통합21은 대선을 하루 앞둔 18일 민주당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를 선언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막판 파란이었다. 노 후보에겐 엄청난 위기였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겐 막판 역전의 기회였다. 하지만 대선의 월계관은 노 후보 차지였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대법원 판사, 중앙선관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거치면서 원칙에 충실한 대쪽 이미지를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특히 국무총리 시절인 1994년 4월 22일 오후 김영삼 대통령과 충돌한 후 사표를 냈다. 이 일은 그에게 전화위복이 돼 국민에게 ‘대쪽 총리’라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한나라당은 그해 4월 13일부터 경선을 시작해 5월 9일 이회창 후보를 대선 후보로 결정했다. 대선 재수(再修)였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는 최병렬(서울시장 역임), 이상희(과기부 장관 역임, 현 세계한인지식재산전문가협회장), 이부영(열린우리당 의장 역임)이 나왔지만 역부족이었다.
노무현과 이회창 후보는 그해 11월 12일과 13일 전자신문과 한국정보산업연합회, 전국경제인연합회 정보통신위원회, 한국CIO포럼, 벤처기업협회, 인터넷기업협회 등이 공동으로 전경련회관 20층 경제인클럽에서 개최한 ‘대선 후보 초청 IT정책포럼’에서 IT정책을 발표했다.
IT 업계는 이 포럼에 주목했다.
노무현 후보는 12일 오전 7시 30분 정견 발표에 이어 패널들과 질의응답을 했다.
김동재 연세대 교수의 사회로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패널토의에는 이현덕(전자신문 편집국장)과 김선배(전경련 정보통신위원), 이강인(인터넷기업협회 부회장), 장흥순(벤처기업협회장), 이정욱(디지털타임스 논설실장) 등이 참석해 IT정책과 관련한 노 후보의 견해를 물었다.
노무현 후보는 이 자리에서 IT정책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집권 후 “청와대에 IT수석을 둬 관련 정책을 총괄 조정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노 후보는 △튼튼한 정보화 기반의 지식강국 △IT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산업국가 △국민 모두가 정보화를 누리는 복지국가 △세계를 선도하는 IT강국 건설 등 IT분야 4대 비전 10대 공약을 제시했다. 노 후보는 또 앞으로 10년간 100만명의 IT 전문인력과 세계 최정상급 핵심인력 1만명을 집중 육성, 튼튼한 정보화 기반의 지식강국을 건설하겠다고 말했다.
노 후보는 포럼 시작에 앞서 패널들과 대기실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환담했다.
이 자리에서 노 후보는 “나는 전자신문 애독자”라며 “아들(노건호)이 전자신문을 열심히 보는데 시간에 쫓겨 기사를 다 읽지는 못하지만 제목만은 꼭 본다”고 말했다.
노 후보는 이날 연설문을 읽다 잠시 자신과 정보기술과의 인연도 소개했다.
그는 “1980년대 초 정보기술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서점에서 전자정보처리시스템(EDPS) 개론을 한 권 샀으나 어려워 내용을 알 수 없었다”며 “그래도 계속 공부해 1980년대 말 동료 변호사들이 타자기나 워드프로세스로 변론문을 작성할 때 자신은 워드프로세스 ‘장원’을 구입해 개인용 컴퓨터에 설치해 놓고 쓰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1990년대 초 PC통신이 대중화되자 하이텔을 사용했고, 1993년에는 사무실에 9000만원짜리 서버를 들여놓고 그룹웨어를 설치해 전자결재도 시도했다”면서 “그 빚 갚느라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이날 포럼에는 새천년민주당의 강봉균(정통부 장관 역임, 현 전북도지사 예비후보), 김효석(현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 남궁석(작고, 정통부 장관 역임), 정세균(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허운나 전 의원(현 채드웍송도국제학교 고문) 등과 박성득 전자신문 사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 이용태 삼보컴퓨터 회장(현 퇴계연구원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13일 오전 7시 30분 같은 장소에서 열린 이회창 후보의 포럼은 김동재 연세대 교수의 사회로 열렸다. 패널토론자로 이금룡(한국인터넷기업협회 고문), 장흥순(벤처기업협회장), 오해진(한국CIO포럼 회장), 이현덕, 이재권(아이뉴스24 편집국장)이 참석했다.
이회창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과학기술과 IT를 포함하는 수석비서관을 둘 계획”이라며 ‘세계 3대 IT강국 도약’이란 비전을 제시했다.
이 후보는 세계 최고 수준의 산업 기반 및 초고속망을 잠재력으로 정부의 확고한 정책 의지와 대통령의 리더십을 결합해 세계 3대 IT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정책을 밝혔다.
이 후보는 이 같은 비전을 바탕으로 5대 ‘IT코리아 모습’과 이를 위한 7대 전략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이 후보는 세부 방안으로 △IT투자 활성화와 IT 기반 신산업 육성 △IT 핵심·원천기술 개발 가속화 △창의력 있는 세계 일류 IT인력 양성 △통신서비스 시장의 공정경쟁 질서 확립 △정보화를 통한 정부 경쟁력 강화 △e라이프(e-Life) 구현을 통한 국민 삶의 질 향상 △반듯한 정보사회의 정착의 7대 전략을 제시했다.
이날 포럼에는 오명 아주대 총장(과기부총리 역임, 현 동부 제조유통부문 회장), 윤동윤 전 체신부 장관(현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 박성득 전자신문 사장, 이용태 정보산업연합회장, 한나라당 김형오(국회의장 역임), 이상희, 임태희(청와대 비서실장 역임), 권영세(현 주중대사) 의원 등이 참석했다.
이 후보는 전날 노 후보와 차별화를 위해 당시로서는 파격인 파워포인트로 정책을 발표해 정보화 마인드를 과시했다.
노 후보의 IT정책은 외부 자문그룹인 현정포럼에서 마련했다. 내부에서는 강봉균·남궁석 전직 정통부 장관과 김효석·허운나 의원 등이 참여했다.
현정포럼은 이주헌 한국외국어대 교수(노 후보 IT특보,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 역임)가 이끌었다.
이주헌 교수의 회고.
“2002년 초 친구인 천정배 의원이 전화를 해 노 후보를 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아는 게 IT밖에 없는데’라며 생각해 보자고 했는데 그게 계기가 돼 노 후보를 돕게 됐습니다.”
그는 노 후보의 IT정책 개발과 자문을 위한 모임으로 학계와 업계 인사들과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남용 숭실대 교수와 박용찬 인터젠컨설팅그룹 대표, 최승억 SAP코리아 대표 등이 주요 역할을 했다. ‘정보통신 일등 국가를 만들겠습니다’는 캐치플레이즈도 남궁석 전 장관과 같이 만들었다.
당시 노 후보 정책자문단장인 김병준 교수(청와대 정책실장 역임, 현 국민대 교수)도 이 교수에게 “IT정책은 신경을 못 썼다. 이 교수가 책임지고 정책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 교수는 대선포럼 연설문도 작성했다.
이 교수의 말.
“당에서 만든 초안을 넘겨주며 ‘검토를 해달라’고 해서 봤더니 수정해야 할 대목이 많아 밤을 꼬박 새워 내용을 대폭 손질했습니다. 토론자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 자료와 포럼에서 분위기 연출 각본까지 마련해 노 후보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날 저녁 노 후보가 이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이 교수님 오늘 수고 많이하셨고 고마웠습니다.” 기분 좋은 전화였다.
승자와 패자, 기대와 실망, 환호와 좌절이 엇갈리는 가운데 그해 12월은 다음 여정을 향해 저물어갔다.
IT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