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망 기다리다 지친 업계 ‘각자도생’ 나서…폐업 기업도 속출

국가 재난망 사업이 장기간 표류하면서 관련 업계가 각자도생에 나섰다. 무작정 사업 추진만 기다리다가는 더 이상 회사를 운영할 수 없다는 위기감에서다. 정부를 믿고 기다리다 폐업하는 기업이 속출하면서 무선통신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업으로 업종 다변화를 꾀하는 업체도 생겨났다.

30일 무선통신업계에 따르면 2007년 감사원 지적으로 재난망 시범사업이 중단된 이후 와이브로, 테트라, 기지국, 중계기, 무선단말기 등 관련 업체들은 크게 세 가지 길을 걷고 있다. 꿋꿋하게 무선통신 시장에서 재난망 사업을 기다리는 업체도 있지만 이미 폐업했거나 신규 사업을 시작한 곳도 많다.

대표적 국산 무선통신기기 전문업체 U사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무선통신 사업을 영위하는 업체 중 한 곳이다. 지난해부터 거의 매출이 발생하지 않아 구형 아날로그 제품을 팔며 근근이 사업을 유지하고 있다. 안전행정부가 재난망 사업 예비타당성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신규 단말기(무전기)를 도입하지 말라고 각 기관에 공문을 보냈기 때문이다.

U사는 재난망 시범사업이 진행되던 2005년부터 중소기업 치고 적잖은 150억원을 투자해 재난망 전용 디지털 단말기를 개발했다. 1세대에 이어 2세대 모델도 추가로 나왔다. 하지만 팔 데가 없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재난망 전용으로 개발했기 때문에 민간 업체에 팔기도 어렵다.

회사 관계자는 “우리처럼 제품을 제조하는 곳뿐만 아니라 외국 제품을 들여와 유통하는 곳 모두 간신히 회사를 유지하고 있다”며 “명확한 근거를 밝히지 않은 채 12년째 사업을 추진을 미루는 통에 여러 곳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무전기에 필요한 배터리, 충전기, 액세서리 등을 만드는 협력업체 10여곳은 거의 폐업 직전이라고 말했다.

주요 업체 중에서는 이미 폐업한 곳이 적지 않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 얘기다. 테트라 중계기 선두주자였던 KM텍은 오래전 사업을 접었다. 이후 직원들이 모여 FTC를 설립했지만 재작년 문을 닫았다. 상장사였던 중계기 제조사 W사는 상장이 폐지되고 중계기 사업을 철수하는 등 존폐 위기에 몰렸다. 100% 재난망 때문이라도 단정 짓긴 어렵지만 재난망 사업 연기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무선통신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업체도 나타났다. 무선통신 서비스 전문업체 리노스는 백화점에서 판매되는 키플링 가방의 한국 총판을 담당한다. 현재 패션 사업에서 무선통신보다 많은 매출이 발생한다. 무선통신 사업은 지난해 매출 중 70%가 유지보수에서 나올 정도로 신규 사업이 거의 없다.

리노스 관계자는 “2007년 수도권 시범사업 중단 이후 통신 매출이 급감해 지금은 패션 분야가 주 수익원이 되고 있다”며 “최근엔 신약 임상체험을 전문으로 하는 드림C&I를 인수하는 등 사업 영역을 다변화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2012년 2월 60여 재난망 관련 업체는 청와대와 각 정당에 재난망 사업의 조속 시행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지난해 2월 시작된 예비타당성 조사는 아직도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지만 정부 재난망 담당자들은 “아직 논의 중”이라는 답변 외에는 명확한 방침을 밝히지 않고 있다. 대부분 업체는 힘든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제품 판매가 어려워 해외 진출을 모색 중이라는 한 와이브로 전문업체 사장은 ”우리나라에서도 와이브로를 제대로 쓰지 않는데 어느 나라에서 쓰려고 하겠나”라며 “세월호 사건이 터지니까 일부 공무원이 이제야 관심을 보이지만 대부분은 총대를 메기 싫어서 여전히 ‘복지부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