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EU)이 글로벌 빅테크의 망 무임승차를 방지하고 네트워크 투자 비용 분담을 위한 중재 제도를 도입한다. 망 이용대가를 둘러싼 통신사(ISP)와 콘텐츠제공사업자(CP) 간 분쟁조정 권한을 법에 명문화한다는 점에서 국내 입법 논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EC)는 21일(현지시간) 이같은 내용을 담은 '디지털 네트워크법(DNA)'을 발의했다.
산재된 EU 통신 관련 규범을 단일 법률체계로 통합한 법안이다. 상당 기간 의견수렴을 거쳐 발의된 한국의 정부 입법에 해당한다.
이번 법안 핵심은 제192조에 규정된 '자발적 조정 절차'다. 통신사와 글로벌 빅테크 간 협상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규제기관이 개입하는 '조정회의'를 의무화한다. 트래픽 유발에 따른 이익은 네트워크 투자에 공유돼야 한다는 망 공정기여 원칙을 법제화한 것이다. 망 대가 협상에 응하지 않는 빅테크에 대해 EU가 사실상 규제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전문가들은 EU의 입법이 미국의 통상 압력을 피하면서도 협상력을 높이려는 고도의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망 이용대가를 법으로 강제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반발을 고려해 '분쟁 조정'이라는 형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또, 이번 법안은 회원국 재량에 맡기는 '지침'이 아닌 EU 전역에 즉시 법적 효력을 미치는 '규정' 형식을 취해 규제 집행력을 강화했다.

주목할 점은 EU 산하 유럽전자통신규제기구(BEREC)의 기능을 대폭 강화한다는 것이다. 법안은 기존 BEREC 사무국 명칭을 디지털네트워크 사무국(ODN)으로 변경하고 역할을 강화한다. 기존 BEREC이 EU 집행위의 자문기구 역할에 그쳤다면 앞으로는 사실상 분쟁 중재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 개별 국가 규제기관이 해결하기 힘든 글로벌 빅테크와의 분쟁에서 EU가 단일대오로 대응하는 효과다. 이에 따라 BEREC는 법안 발효 후 1년 내에 트래픽 연결 관련 모범사례 등 가이드라인을 제정한다.
EU가 미국 통상 압박에도 DNA 입법을 강행한 배경에는 AI 산업의 폭발적 성장이 자리 잡고 있다. AI 서비스로 인해 트래픽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빅테크가 망 투자 비용을 분담하지 않을 경우 유럽 통신 인프라가 붕괴되거나 빅테크에 종속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이다.
통신 전문가는 “시장 자율협상을 우선하되 분쟁시 공적 기구가 개입하는 중재 모델을 택한 것”이라며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직접적 망 대가 부과 금지 압박을 우회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빅테크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EU의 이번 입법은 답보 상태인 우리나라의 망 무임승차 방지법 논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국회에서 여야 모두 망 공정대가 관련 법안을 발의했지만 미국과의 통상 마찰 우려로 속도를 내지 못했다. 통신사와 글로벌 빅테크간 망 대가를 둘러싼 갈등을 제어할 선례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의미있다는 평가다.
박준호 기자 junho@etnews.com


















